새해맞이 산행기-정월 초하루, 초이틀

조회 수 2161 추천 수 0 2004.01.03 10:22:00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 머물고 있을 무렵이었는데요,
길을 걷는데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앴습니다.
처음엔 약간의 현기증이라고 생각했고
낯선 땅에서의 불안감정도라고 여겼댔지요.
그런데 달포가 지나도 별반 나아지질 않는 겁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별을 세고 있던 어느 밤,
올려다 본 하늘이 '우주'라는 말을 실감케 했는데,
그게 말입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아주 맑고 깊은 호수같은
내 나라의 하늘과 너무나 다른 하늘이 거기 있는 겁니다.
그야말로 광활한 우주,였던 거지요.
그제야 무릎을 쳤습니다.
심지어 바다에 나서도 뒷길이 산으로 바로 이어지는 내 나라,
너른 들 끝도 산자락과 바로 닿아있어서
산을 빼면 도저히 풍경이 안되는 내 나라,
어데고 서 있노라면 바로 그 산이 기준이 되어
내 선 곳의 좌표점이 되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산이라고는 답체 뵈지 않는
시드니의 거리에서 자꾸만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게지요.
여러 나라를 돌고 돌던 두어 해,
돌아오면 가장 하고팠던 게 산행이었습니다.
길을 떠나노라면
심지어 바다로 나갔을 때조차 그 길은 산으로 끝이 났댔지요.
돌아오면 무엇보다 지리산을 오르자 했습니다.
아픈 무릎으로 그 바램을 접었을 때
어찌나 오래 마음이 아리던지요,
그리운 이를 만나지 못할 때마냥.

정월 초하루 해맞이를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하고
기락샘과 하다랑 길을 떠났지요.
산봉우리를 오르진 못할지라도
고아래 절터까진 가자하고 나선 길이었습니다.
덕유산 향적봉(1614m)아래 백련사를 향해
삼공매표소에서 산을 들어섰는데
웬만큼 오르니 아이들이 줄고
더 오르니 어른도 줄더이다.
그런데 산이 그래요,
늘 불러대지요,
돌아설 수 없게 불러대지요.
날은 찬데,
해는 지는데,
백련사의 뒤란 너머 향적봉이 소리쳐 부르대요.
얼쩡얼쩡하다 산을 탄 게지요.
아이젠은 고이 장롱에 모셔두고
등산화는 고스란히 차 트렁크에 실어둔 채
글쎄, 구둣발로 찍은 산행이었다니까요.
산을 오른다고 나선 길이 아니었으니...

'하다'는 정말 날데요.
길 따라만 온 것도 아니고
무슨 무슨 연못마다 다리 건너 개울 건너 다 들여다보았으니
그 길이 펼치면 적지도 않을 거린데
여전히 '하다'는 사람들 무데기의 맨 첫 자리를
어른보다 나으면 나았지 모라자지 않게
잘도 걷데요.
그래서 곁에서 같이 오르던 이들이
기특하다고 '하다'를 내내 입에 올렸더랬지요.
"어머니, 제가 왜 안미끄러지는지 알아요?"
힘을 다리 아래로 내려 보낸답니다.
그리고 발을 뒤꿈치 쪽으로 콱 찍으면
얼음이 패이면서 중심이 잡히고
눌러진 땅이 몸을 잡아준답디다.
내리막길 두 차례 얼음판에 미끄러지고 얻은 지혜였네요.

구천동을 나와 무주 읍내로 넘어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적상산의 안국사를 가자 했지요.
적상분소 쪽으로 길을 잡았다가
얼은 길 아니라면 10킬로미터 가까이를 차도 들어간다는 길,
길 좋다는 까닭으로 그 길 오르기를 관두었습니다.
포장된 도로가 아니라 그야말로 산길이 그리워왔으니까요.
서창마을 서창매표소로 차를 돌렸습니다.
요기를 푸지게 하고
향로봉(1029m)을 향해 오르는데
웬만큼 가니 정말 산길이더이다, 산길.
"잘 되세요!"
'하다'가 건네는 새해 인사에
어느 아주머니가 들려준 답례가 마음 환하게 물들이데요.
먼저간 이들의 발자국이 길이 되어 줍디다.
고맙지요.
잘 살아야겠습니다.
'하다'는 눈뭉치를 기락샘한테 던지는 재미로
주르륵 뒤로 미끄러지는 재미로
그 가파란 산길을 잘도 오릅니다.
"손 잡아 드릴까요?"
엄마를 지켜주어야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을
아빠로부터 늘 훈련받은 여섯 살 하다는
엄마가 비틀댈 때마다 얼른 손을 뻗칩니다.
날씨탓인지, 무주리조트에 밀린 탓인지, 아님 평일인 까닭인지
산 오르는 내내 만난 사람무더기라고는
세 덩어리가 전부였네요.
산 하나를 통째 안고 논 하루가 된 셈이었지요.
어느 해 초여름께 주왕산을 가던 길도 그랬답니다.
비가 정말 정말 억수같이 내리던 날이었는데
주왕산 들머리로 가던 버스엔
기사아저씨와 둘 밖에 없었더랬지요.
두 시간 여를 그렇게 달렸지요, 아마.
내리는 걸음 뒤로 아저씨 왈,
전세 버스였네요, 하더이다.
그런 날은 마치 나를 중심에 놓고 돌아가는 우주를 생각해보는,
나쁘지 않은 날이 되는 거지요.

"아!"
능선에 닿아서 우리가 한 말의 전부입니다.
눈꽃 피운 나무들이 줄을 섰는데,
많이도 많이도 줄을 섰는데,
그것 보자고 이리 힘을 쏟았구나 싶었지요.
"다 왔다!"
앞선 기락샘의 소립니다.
꼭대기에서 머무는 잠시,
천국은 이땅에 어데고 참 많기도 하다 생각 들었습니다.
향로봉은 둘레에서 젤 높은 봉우리인지라
메아리가 답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이름자들을 불러보았지요.
그들이 있어서, 같이 이 하늘을 이고 살아서
그것만으로 충분히 고맙습니다.
목이 멥니다.
사랑,
그 번짐을 그냥 그대로 누려도 좋겠습니다.
굳이 관계가 무엇이 된다 하지 않더라도
그가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 일이던가요.
그대(누구라도 그대가 되어)의 사랑도
아리지 않는 푹한 사랑이길 바랍니다.
'그'를 알아서 얼마나 고마운지요.

시무룩했던 해가 물먹은 구름 사이로 햇살을 내립니다.
빛줄기가 그린 선그림이
'새' '시작' 뭐 그런 낱말들로 치환되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겨울나무 사이로 능선 아래의 적상호수도 들여다보고
눈꽃의 절경 앞에 사진도 찍고,
그제야 산이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기
내려왔지요.

상설학교로 문여는 해,
그래요, 얼마나 오랜 꿈이었는지,
게다가 계절자유학교 앞두고 바쁘기 말할 수 없는데
여행을 배려해준 공동체 식구들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길을 떠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젤 큰 것이 '감사' 아닐까 싶습니다.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키운 '하다',
그 아이가 세상과 마주설 때마다
얼마나 실한지를 확인하고 나면
우리 공동체에 대한 믿음도 더 굳건해집니다.
함께 살아서 참말 좋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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