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자 여덟쨋날 1월 12일 달날

조회 수 1710 추천 수 0 2004.01.13 17:16:00


< 내내 살았으면 좋겠어요 >


불이 꺼진 본관을 뒤로하고 운동장을 가로지릅니다.
어스름 녘부터 내리던 눈이 제법 두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대로면 낼은 눈썰매를 탈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한 주짜리 계자였다면 못봤을 눈 아냐."
그렇게 또 절묘한 물꼬의 날씨에 탄복들을 했던 저녁이었지요.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개편된 관계들이 덩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덩어리는 고정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달라집니다.
오빠 누나 형 언니를 끼고 모여 몸으로 뒤엉키고 있는 녀석들,
칠판 턱에 올라서서 주욱 늘어서 노는 녀석들,
홍주와 현주가 나영이를 달래며 밥을 먹고,
동윤샘을 중심으로 우르르 둘러앉아 손놀이를 하거나,
형길샘 둘레에 나무 목걸이를 만드느라 정신없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풍경에 앉아 있으면 그만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 행복한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가,
우리가 정녕 지켜내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
이 소박한 기쁨들을 지키리라, 아이들을 하늘처럼 섬기리라 굳게 다짐합니다.
여기서 내내 살았으면 좋겠다는 놈들이 다온이 연규에서부터 늘어가고
둘러앉을 때보면 식구같다는 느낌,
하도 오래 봤더니 같이 있는 느낌이 되게 강한 것도 상범샘뿐이 아니고
힘들 것도 없고 일상 같다 느끼는 것도 형길샘 뿐이 아닙니다.

석현이랑 승찬이가 진행한 한데모임,
책방에서 연습들을 했다나요,
한 샘이 손을 들고 열심히 얘기를 마쳤는데
우리의 정한 선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한 방 먹였지요.
도형이 뭔가를 일러주는데,
"그런 거는 걔들한테 말해야지."
일축해 버리기도 하고,
아이구, 우리 승진이는 시끄러워죽겠습니다.
우리 예린이도 못지 않지요, 오래 있으면 본성이 드러난다니까요.
이 아이 그리 즐기는 구나 싶으면,
하하, 쳐다만 봐도 어찌나 우스운지...
한데모임은 그 활발하기가 재래시장같으나
한편 얼마나 진지한지...
잘 말하고 잘 듣는 것, 그 토론문화가 당체 없는 이 땅 아니더이까.

점자에서 하나를 가르치면 아홉을 아는 정한이,
친구 그리기 때 종이 위에 누웠는데 너무 예뻐서 천사가 따로 없었던 시량이
나무 깎고 껍질 벗기고 굉장히 단순한 일인데 집중력이 대단했던 녀석들,
곰사냥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끝나니
이제 부메랑에,
엄마가 빨래하면서 깔고 앉을 것 따위 별 이상한 바퀴 달린 것을 다 만드는 뚝딱뚝딱...
'하다'는 곰사냥 끝나서 이제 뚝딱뚝딱 갈 필요없다고 반찬만들기를 기웃거리더랍니다.
다 되려면 멀었으니 한 시간 뒤에나 오라는데
여기서 기다린다고, 그래야 맨 먼저 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정말 한 시간을 기다리고 섰다가 고구마 샐러드를 맨 먼저 받았더랍니다.

반가운 소식도 하나 들어왔지요.
임용고시를 치고 결과를 기다리던 유상샘이
합격을 했답니다.
축하, 축하, 축하!
아이들이 노래도 부르고 너나없이 기뻐합니다.
"잊지 못할 거예요!"
낼이면 유상샘도 서울 가는데
앞을 오래 응시하더니
"아쉬워요. 더 잘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고 아이들이 자꾸 왜 가냐고 다시 오라고,
그래서 아이들이 보고 싶을 것 같기도 하고..."
눈자위가 붉어졌습니다.
"윤실샘은 합격했을 때 돼지 잡았는데...."
유상샘도 쏜다(?)지요, 남은 우리들에게 자장면을.
물꼬에는 그런 전설이 있답니다.
임용고시를 치르고 겨울계자를 다녀가야 붙는다는.
옆에 있던 순옥샘이 증명합니다.
"저도 그랬어요."
정말 그랬거든요, 어느 해 계자왔던 이들은 다 붙고 안왔던 품앗이들이 다 떨어졌던.

겨울놀잇감에서 잣을 만들고 자치기를 했다는데
샘이 열심히 옛규칙을 확인하더니만
웬걸요, 설명도 하기 전 아이들은 저들 수준에 맞게 놀더랍니다.
채에 대기만 하면 10점 하는 식으로.
열택샘이 맡은 체육에서는 몇 날을 검도가 한창인데, 신선하데요.
여태 계자에서 검도를 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더라구요.
우리 열택샘 할 줄 아는 게 참 많습니다.
정말 재주꾼이예요.
어리숙한 듯(?) 보여서 우리를 느슨하게 하면서(같이 방 쓰는 동윤샘 전하기를)
깨어있는 정말 알찬 일꾼이랍니다.

늦게 합류한 새끼일꾼 형석,
"적응이 안되고,
맨날 모르는 일이 한 시간에 한 번씩은 일어나고,
건물도 바뀌고..."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우리의 일정이란 것이 프로그램으로만 있는 게 아닌 까닭이지요.

오늘도 슬라이드로 동화 하나 읽었네요.
며칠 전엔 여러 샘이 녹음해둔 걸 틀었는데,
오늘은 직접 읽어주었지요.
이곳에 살면 보다 소박해져서
이런 아주 작은 변화도 큰 느낌으로 받는 아이들입니다.

오늘은 공동체 아이 여섯 살, 아니 이제 일곱 살 '하다' 얘기를 좀 하려합니다.
물꼬생태공동체에서 아이들이 사는 한 모습을 엿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온 아이들이 차츰 그런 모습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구요.
사택들이며 사무실이며 학교 구석구석은
그 아이 날마다 뻔질나게 드나드는 공간들입니다.
그러니 자기 물건들 또한 곳곳에 늘려있어 공간마다 볼일이 많은 거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드나들지 않기로 한 곳은 안들어가는 거라고
계자 전 미리 아주 강하게 못을 박은 것도 아닌데,
쑤욱 들어갈 법도 한데,
꼭 경계선에 서서 필요한 얘기를 전하거나 샘들을 부릅니다.
간장집 국간장방(엄마가 쓰는 사택)에 들어올 일 있을 때도
다른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부엌 앞에서 소리칩니다.
"어머니 계세요?"
"들어가두 돼요?"
오지 말라는 구역에 스스로 선을 잘 긋고,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레 정해진 것들을 지키는(억압이 아니라) 모습 그대로지요.
저녁을 먹고 그 막바지 즈음이었습니다.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도 아이들끼리 일어난 소란 정도려니 하고 무시하다가
그 긴박함이 느껴져 나갔댔지요.
사택 해우소에서 '하다'가 부르는 소립니다.
아, 화장지...
역시 화장지가 떨어졌던 겁니다.
"어머니, 고마워요."
"왜 여기 와서 눠?"
본관에 붙은
작은 화장실(굳이 밖을 안가도 되는, 안에서 바로 이어지는)이 있는데 말입니다.
"여기가 더 편하니까."
"아래(재래식 큰 화장실)도 있잖아."
"잠겨있어요."
바람이 많이 불어 문을 채웠는데
어른들만 쓰고 있으니 그 문고리가 어른 키에 맞춰 있거든요.
"나는 건강에 좋은 곳에 가, 옛날 화장실이 건강에 더 좋아.
똥도 더 잘 나온다!"
어떤 게 더 우리 몸에 편안한지를 깨달은 게지요.
'하다'는, 이곳에 사는 식구이다 보니 손해볼 때도 많습니다.
입이 야물어 큰 아이처럼 여겨질 때가 아니더라도.
자기 집이지만 계자동안 제약이 많은 건 둘째치고
싸움이 붙어도 지가 더 많이 혼이 난다든지 하는 식의.
며칠 전 윤님이가 대나무를 휘두르는데 뒤에 있다가 눈 아래를 맞았습니다.
별 수 없이 멍이 퍼랬지요.
다른 아이가 그랬으면 달걀을 굴려주거나
내내 문질러 주었겠지요.
약도 발랐을 테구요.
그런데 이녀석이 그러니, 그런갑다 하고 그냥 둡니다.
워낙에 병원을 다니는 곳도 아니고.
만만하고, 소홀히(?) 대하게 되는 거지요.
"친구한테 더 좋은 걸 주는 거야. 과일도 더 큰 것, 더 맛있는 건 친구 먼저 주는 거야."
그런 말조차 혹 그게 마음을 누를 수도 있을 것을
그런 줄 압니다, 저도. 썩 설득이 되는 것 같진 않지만.

한 샘의 하루재기가 우리 맘을 한참 울렸네요.
"자기 전 갑동이랑 칠동이가 싸웠는데
칠동이가 갑동이 따귀를 때렸어요.
그런데 어찌나 오래 숙련된 모습의 따귀였던지,
저 아이는 어디서 저런 행동을 배웠을까 싶데요.
그러면서 어른으로서 내가 보이는 모습에 대해 생각했어요.
아이 때는 주위 어른을 보고 배우는 거니까."
잘 살아야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합니다.
그래요,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어른들은 어떤 식으로든 교사이구말구요.

이곳에서 무엇이 가장 중하냐 묻는다면 뭐라 답할까요?
누가 칠판에다가 써놓았습니다.
"여기 올라가면 밥 세 번 없음."
칠판 턱에 올라가는 아이들 땜에 고아래 앉은 이들이 불편했던가 봅니다.
여기서는 '밥'이 정말 중요한 무기가 되지요.
그야말로 밥이 하늘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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