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자 아홉쨋날 1월 13일 불날

조회 수 1668 추천 수 0 2004.01.15 07:16:00
< 물 흐르드끼 >

아무도 밟지 않은 운동장에서 크게 한바퀴를 걸어보고
'자유학교 물꼬'라고 써보았습니다.
눈(雪)에 새겨 넣은 이름은 청아합니다.
정화를 불러오는 것도 눈(雪)이 반가운 한 까닭이겠습니다.
차고 맑은 아침입니다.
한바탕 대청소를 하기로 했지요.
옷도 정리하고 가방도 다시 꾸리고
우리 사는 곳을 구석구석 살펴봅니다.
다시, 다시, 다시!
그것은 '처음처럼'의 다른 이름 아닐지요.
아침 때를 건져먹고 잠시 쉬는데
이장님의 안내방송입니다.
마을길을 쓸자 하십니다.
우리도 죄다 부역을 나갔지요.
곰사냥을 나섰던 도구들이 다시 좋은 역할을 합니다.
더러는 삽도 들고 눈을 밀만한 농기구를 알아서 하나씩 끌고 나왔습니다.
열택샘, 멀리서 모든 쓰레받기도 챙겨옵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그저 기특하다 웃으시고
아이들 어깨를 안아주시거나 이것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한바탕 땀을 빼고 돌아오는 운동장,
누구랄 것 없이(역시 시작은 소곤소곤방 아그들입니다) 눈밭에 드러누웠지요.
아, 하늘...
우주가 우리 안으로 와락 달겨드네요.
우리는 소리를 질러보거나 잠시 몸을 일으켜 곁에 있는 이를 보기도 합니다.
가만히 눈을 감아보기도 하는데,
함성 소리 들리며 갑자기 눈, 눈, 눈더미가 얼굴로 뛰어듭니다.
형길샘, 동윤샘, 열택샘들이 눈을 얼굴로 비벼대옵니다.
우리들의 복수전,
이제 운동장은 눈이 아니라 아이들로 온통 뒤범벅되었습니다.
그래요, 눈이 아이들이고 아이들이 눈입니다, 눈 말입니다.
강아지 저미 까미 잡식이도 신이 났습니다.
오늘은 점심 때 건지기까지 눈이랑 놀아 제끼자 합니다.
얼음집을 만들어 들앉은 놈들도 있고,
눈사람을 만들던 패들도 있고,
내내 뛰어댕기는 놈들도 있고,...

대동놀이는 오늘 춤판이었지요.
남자랑 여자랑 짝이 되어보고
노래가 한 바퀴 끝날 때마다 짝을 바꿔가며
땀 삐질삐질 나도록 춤을 춥니다.
"하얀 눈 위의 구두 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
짝을 이뤄 추던 춤을 혼자 흔들기로 합니다.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앞에서 희정샘과 세이샘이 무대가 무너지도록 춰대고
우리는 강당 지붕에 닿도록 흔들어댑니다.
묵은 마음들을 털어냅니다.
내 안의 자유를 끄집어냅니다.

한데모임 직전 진만과 석현이가 싸웠습니다.
뭐 그리 대수로울 거야 없었지만
마침 우리는 모두모임방에 있었지 않았겠어요.
싸움구경 불구경 그냥 못지나가지요,
갑자기 우르르 가운데를 비우고 싸우라고 싸우라고 하는데
외려 판을 만들어주는데,
이 녀석들 주춤합니다.
양쪽 얘기를 들어보았지요.

진만: 쟤가 먼저 밀었어요.
영경: (석현을 보며) 네가 먼저 밀었다잖아.
석현: 쟤가 밀었단 말예요.
영경: (진만을 보며) 니가 밀었다는데...
진만: 아니예요. 쟤가 때렸다니까요.
영경: (석현을 보며) 니가 때렸다잖아, 왜 때렸어?
석현: 아니예요, 미니까 때린 거지.
영경: (진만을 보며) 밀어서 때렸다잖아, 왜 때렸어?

그러다 피식 웃어버리는 두 사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치는 웃음물결...
씩씩댈 싸움조차 놀이가 되는 이곳입니다.
때론 심각한 것이 또 아무것도 아닌 것과 얼마나 닿아있는지요.
처음과 끝도 그런 것일 테고 겨울과 봄이 그러하고
깊은 슬픔과 웃음이 그러하듯이.
그래요, 암것도 정말 아무것도 속이 상할 게 없습니다, 없어집니다.
우리는 푸는 법을 익혔거든요,
더 오래 전부터 우리 안에 들어있었던 겁니다.

기태랑 재헌이가 한데모임 사회를 보았습니다.
1년 호준이, "한데모임 아닌 것 같아요."
도저히 분위기 마음에 안든단 말이지요.
"사회자가 뭐 저래?"
일곱 살 윤님이가 사회자 태도가 불량하다고 한 소리 보탭니다.
"사회자보다 잘하네."
2년 시량이의 다부진 발언에는 아이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요.
재헌이가 보글이 시간에
다른 이를 먼저 챙겨주지 못하고 음식에 애처럼 달겨들어서
한 소리를 들었던 앞부분과는 달리
그 시간 마무리 즈음 빈 그릇들을 죄다 가마솥집으로 옮겼고
덕분에 부엌샘들은 차근차근 설거지를 잘할 수 있었다 칭찬을 하는데,
우리의 정한 선수 재헌이를 보고
"낯뜨거운갑네."
웃겨주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이었더라, 무슨 일인가로 승찬이가 비난을 샀는데,
"죄송합니다!"
하고 얼른 고개숙여서 되려 박수를 받기도 하였지요.
우리의 연규 선수도 손을 번쩍 들더니
"당번이었던 동윤샘, 설거지 안하고 어디 가셨어요?"
혼을 냈습니다.
모두 분노하며 동윤샘을 찾습니다.
깜빡잊고 딴짓하다 늦게야 설거지를 했다는 해명을 듣고는 잠잠해졌지요.
어느 샘이 하루재기에서 그러데요.
"한데모임을 보니 무르익을 대로 익었다는 느낌이더라.
나쁜 쪽으로는 까부는 게 도가 지나치다고 할까..."
글쎄요, 나중 얘기는 잘 모르겠는데
아이들은 정말 활발하게 삶의 현장,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기 맘을 드러내고 서로를 만들어갑니다.
재헌은 마지막에 사회자가 어떤 모습이면 좋을지를 명쾌하게 정리하므로서
자기 반성을 하고 남은 사회자들에겐 좋은 지침을 주었더랍니다.

동네어른 특강에 이웃집 송샘이 오셨습니다.
대해리 바람판에서 주마다 불날에 공동체식구들에게 민요를 가르쳐주시지요.
아이들은 밀양아리랑에 얼킨 설화를
빨려들어갈 만치 듣고 있었습니다.
노랫가락과 장단을 잘 배우고는
저들도 해보겠다 손 번쩍 들고 앞으로 나가는데
어려운 '발표'를 하는 게 아니라
가족 안에서 자연스레 즐기는 느낌들을 줘서 마음 참 좋데요.
예린 영환 석현이부터 여섯이 줄줄이 나가서 하는데,
특별한 이들만 하는 예술이 아니라
보통의 누구나가 즐기는 예술이었다 뭐 그런 것이었단 말이지요.

국수(밀가루)를 중심재료로 놓고 보글보글방을 했습니다.
칼도 잡아보고 부침개도 뒤집어 보고 간도 보고
다른 날과 그리 다를 것도 없는데,
역시 그 다양한 맛에 즐거움 더했지요.
찹쌀뭉치튀김(아이들은 찹쌀 폭탄이라 불렀지요)을 했는데,
설탕이 남았더랍니다.
보아하니 먹고싶다 이거지요,
해서 숟가락과 그릇을 들고 섰더니
주욱 한 줄을 서데요, 작은 놈이고 큰 놈이고가 없습디다.
차숟가락의 반도 안되는 걸 밥 숟가락으로 뜨는데
벌써 고개젖히고 입 벌리고 있습니다,
장난끼를 얼굴에 잔뜩 머금고.
경민이 차례입니다.
"많이요."
"비켜라."
"아, 알았어요, 그냥 주세요."
그렇게 톡 털어넣어주고
승찬이 차례가 되었지요.
"조금 많이요."
"비켜라."
"아, 아니예요, 그냥 적게 많이요."
"비켜라."
"아니, 그냥 조금요."
"비켜라."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냥 주세요."
그제야 톡 털어줍니다.
이제 끝에는 한 차 숟가락만큼 남았는데,
어린 놈들을 찾았지요.
갑자기 와아 하더니 그걸 덮치는 아이들패와
지키려는 제 주먹(그릇 안에 주먹으로 설탕을 감쌌더랬지요.)이
한 판 대동놀이했지요.
힘에 부쳐 그릇을 치켜듭니다.
그때 한 녀석이 절박하게 외칩니다.
"선생님, 선생님!"
그릇 밑바닥에 설탕이 조금 묻었다합니다.
밑바닥 테두리, 물기 땜에 묻혀져 있던 거였나봐요.
구경하던 아이들도 지켜보던 어른들도 웃느라 난립니다.
젤 어린 두 녀석 찾아 설탕 멕이고
그릇은 통째로 좇아다니던 녀석들한테 넘겼지요.
배를 잡고 뒹굴었습니다.
그래요, 선생은 역시 아이들 속에 있어야 합니다.
재밌어요.
세상에 하고많은 직업가운데 아이들과 하는 일이라니,
다시 태어나도 이 일 하지 합니다.
행여 이 글 읽고는 하이고 우리 애들이 못먹고 사나 부다 생각하시려나?
그게 아니라 반성하시는 게 옳을 줄 압니다.
평소에 어찌나 단맛들을 멕이고 사는지 말입니다.(하하)
혹은, 제발 애들 좀 잘 먹이셔요,
하이구 겁나게 먹어댑니다요.
어른들이 그러셨다니까요, 사람 입이(먹는) 젤 무섭다구,
실감하는 요즘입니다요.

정말 식구같이들 있으니 별 게 다 재미고 별 게 다 이야기꺼리입니다.
휘젓고 다니는 경민이가 참한 지선이 동생이라는 사실을 늦게 안 녀석이
밥 먹다 말고 지가 아는 경민이가 그 경민이 맞는지 확인하러 나가질 않나,
작업실 뒤편에서
뚝딱뚝딱끼리들 저녁 6시에 모여 은행을 구워먹고 비밀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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