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9.26.쇠날. 맑음

조회 수 1168 추천 수 0 2008.10.10 17:51:00

2008. 9.26.쇠날. 맑음


간장집 처마로 늦은 박이 오르고 있습니다.
옆으로 번져가는 그를 잠시 감아주면 될 것을
그냥 지나치고 말던 여름날들이었더랬지요.
그래도 그가 피고 지는 걸 보며 저녁쌀을 앉혔던 옛 어머니들처럼
저녁답이면 그렇게 박꽃 하이얗게 피었습니다.
그걸 여름 다 지나 지붕까지 매달아둔 끈들에 감아주었는데,
한창 푸른 잎들이랍니다.

간장집 앞에 남은 밭을 마저 팹니다.
길을 사이에 두고 한 편에만 이랑을 만들어 배추를 옮겨 심었는데,
나머지 배추 70포기도 거기 심었지요.
고스란히 자란다면 배추 350포기, 무 100개를 얻을 것입니다.
“올해는 딱 이만치만 김장 할 거다.”
하지만 이리 솎아내고 저리 뽑아 먹고 나면,
또 벌레도 주어야지요,
정작 김장 때는
이웃 농가에서 실어올 게 더 많지 않으려나 짐작해본다지요.
아, 얘기했던가요,
포트에 종자를 낼 때도 꼭 세 알을 심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위해, 다른 하나는 땅 속 것들을 위해,
나머지 하나는 땅 밖 것들을 위해 키우지요.
그 마음도 예 와서 배웠답니다.
무배추에 약도 뿌렸습니다.
물 한 말에 소주를 댓병으로 한 병 반 섞었지요.
배추벌레를 좀 잡을 수 있으려나요...

이웃 마을에서 대처로 돈 벌러 간 젊은 친구가 있습니다.
제가 공부를 나가는 곳에서 만난 친구이지요.
학비를 번다고 갔지만
까닭이 또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얽힌 사람들 관계를 힘들어 한 부분도 적지 않지요.
그 안에 같이 얽혀있을 땐
이런 저런 관계에 치여 편치 않다가
비로소 밖을 나가니 전화도 쉬워졌던 걸까요.
그래요, 무식한 울엄마 그러셨습니다.
때로 사람살이 힘겨울 땐
먼 우주로 자신을 데려가 이곳을 내려다보라고.
관계도 그렇겠지요,
멀리서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누구는 말도 안 되는 윗사람 눈치가 보여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힘에 겹기도 했더란 얘기도 있었지요.
좋은 어른은 관계의 조화와 평화에 기여하는 사람일 겝니다.
저만 해도 지난 학기
오히려 구성원들의 관계를 파편화시키는 두엇의 어른을 보았습니다.
멀리 떠난 친구의 안부전화를 받으며
어른의 역할을 다시 새기게 됩디다.

이번 학기 처음으로 올라온 송백윤샘이랑
고래방에서 한바탕들 악기를 두들긴 뒤
아이랑 서울 왔습니다.
내일 한 살림에서 강연이 있습니다.
기락샘과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인문학이 죽었다고 자주 통탄해왔잖아,
그리고 교육 안으로 다시 끌어들여야한다고...”
대학에서 위축된 인문학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고
그것 아니어도 오랫동안 인문학적 소양의 부족을 외치며
우리 교육에서 그걸 채워내야 한다 역설해 왔지요.
“그런데 말야, 그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어?”
우리가 인문학 교육을 강화해야한다고 하지만
실제 그것을 강화했을 때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가
오늘의 주제였답니다.
기존의 제도와 관련해서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그게 정녕 긍정적일 게 맞는 걸까 살펴보자는 것이었지요.
예컨대 기존에 없는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날 수 있었던 것도
그 과정에서 인문학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
입시교육 만으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문학교육을 강화하게 되면
혼자 공부해서 성취나 성공에 이르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건 아닐까요?
인문학교육이란 게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이들로부터 나오게 될 텐데,
이 계층이 바로 부모가 중산층,
그러니까 그런 교육에 신경 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란 겁니다.
프랑스만 보더라도 바칼로니아라는 시험이 얼마나 어렵답니까.
학교에서 주어진 교육만으로 힘들다지요.
그런 걸 가족 내에서 부모의 관심과 지원을 통해 이뤄나간다 합니다.
그래서 실제 보게 되면
부모의 계급 지위에 따라 학업 성취, 진로성취가 결정된단 말이지요.
프랑스 사회에서 문화자본을 말하는 것도 결국 그런 맥락이겠습니다
(그게 기능론에 반해 갈등론이 교육에 접목되는 한 갈래이겠구요.).
자,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지금까지 문화자본이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아주 작았고,
그만큼 문화자본 없는 사람들도 성공할 기회가 지금까지 있어왔다는 얘긴데,
만약 인문학적인 교육을 단순히 강화한다면
계층 또는 계급을 더욱 심화시키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의도와 달리 역효과나 의도하지 않는 결론을 낳을 수 있지 않겠냐는 거지요.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으로서는 효과가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인문학교육을 해야 한다는 전제를
다시 깊이 고민하게 된 밤이라지요...
하기야 인문학교육이 어디 나쁘겠습니까.
늘 제도의 문제로 가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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