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9.28.해날. 맑음

조회 수 1118 추천 수 0 2008.10.10 18:07:00

2008. 9.28.해날. 맑음


은행을 털었습니다,
하고 쓰고 나면 꼭 혼자 한 번 웃습니다.
Bank를 생각하는 거지요.
은행털이범 말입니다.
은행을 털고 주웠습니다.
먼저 해놓았던 것은 비닐 포대에 담아두니
잘 삭아 껍질 까기도 편하지요.
물론 겉 말입니다.
무밭에 약도 주었습니다.
오줌 한 말에 물 세 말을 섞어 흩뿌립니다.
이거 키우는 것 말고는 마늘 놓는 일만 올 농사로 남았네요.

엊저녁에 자정에 역에 내려 바로 양강으로 갔습니다.
대해리는 김천 쪽으로 영동 끝이고
양강은 저쪽 금산 쪽으로 영동 끝이지요.
서로 반대편에 놓인 셈입니다.
거기 양문규샘이 하는 계간지 ‘시에’에서 주관하는 문예한마당으로
곳곳의 문학인들이 모이고 있었지요.
이 시대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자리들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영동 살면서 그냥 지나면 되냐며
늦게라도 얼굴 비치라는 선배들 강권에
문학의 섬, 그 먼 나라에 발 살짝 댔지요.
오래전 어느 한 때 열심히 시를 쓰고 동화를 쓰던 시간이 있었더랍니다.
지금은 물꼬가 제게 시이고
물꼬에서의 나날이 제 동화이지요.
밤새 노래에 젖고 시에 젖다가
노장 서정춘샘과 심호택샘은 대해리까지 건너오셨네요, 새벽 네 시.
물꼬에 왔으니 또 물꼬 얘기 전해드리지요.
재밌어들 하셨습니다.
그리고 늦은 아침 다시 양강으로 건너들 가셨지요.
다음해는 물꼬에서 모이면 어떨까 하는 의견도 나왔더랍니다.
지난 해 가을엔 시인 박두규샘이랑도 그런 얘기 있었는데...
그래도 또 좋겠지요.

양강에 나간 길에 영국사에 들립니다,
마침 혼자 기차를 타고 내려온 류옥하다 선수도 실어서.
거기 천년을 산 은행나무 있지요.
영국사까지 가서 절문도 들어가지 않고
그저 은행나무만 보다 내려오기도 했더랍니다.
언제 아이랑 꼭 다시 가자던 곳이었습니다.
나무는 가지가 땅에 닿아
다시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뻗은 부분도 있습니다.
천년...
천년을 지고 뜨는 해를 보고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전쟁도 보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도 보고...”
“그러게...”
“엄마, 계절은 몇 번을 지나친 걸까...”
우리는 둘레를 돌아 거닐며 나무를 쳐다보고 또 보고,
멀찍이서도 바라보고 또 보고,
그리고 가다가 또 돌아보고 하였답니다.

늦은 밤 홈페이지를 훑어봅니다.
엊그제 만나고 온 제자 하나가 글을 남겼습니다.

선생님, 너무 오랜만에 뵈어서 죄송스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습니다.
그대로시더라고요. 외모도 생각도..

늘 선생님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다 지나고..
저희는 이제 선생님의 주장에 반론을 펼칠 정도로 많이 커버렸네요.

갓 교사가 된 대웅이가 남긴 글이었습니다.
정말 훌쩍 커버린 아이들이었지요.
스물 예닐곱들입니다.

정말 힘든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저는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개척하는 선구자의 마음을 압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것은 선생님의 그것과는 또 다르겠죠.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누구보다 대단하십니다.

제가 그들에게 했던 격려를
이제 그들이 제게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한국의 명시'라는 책을 사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은 꽤 두꺼웠고 비쌌습니다.
집안이 어려워서 집에 사달라는 말도 못하고 빈손으로 왔었죠.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 선생님은 선생님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소중한 그 책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 책은 지금도 제게 책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 일이 있었더군요, 제게는 잊힌.
제 은사님도 제가 너무나 선명히 기억하는 일화를
당신은 잊고 계셨더랬습니다.
주는 이는 그리 잊고 받은 이가 기억하며
다시 받았던 이는 주는 이가 되고....
그래서 ‘내리사랑’이란 말도 생겼을 겝니다.
아이들은 많은 걸 기억합니다.
저는 자주 아이들 앞에서 등을 곧추세웁니다.
저들이 자라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일찍 그리 알았어야 했을 걸,
하기야 더 늦기 전에 알아 또 한편 다행입니다.

책을 주시면서
'네가 어떤 상황에 있든, 어떤 죄를 지었든, 나는 네 편이다.'
라고 말씀하신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이제는 제가 그 말을 해 드릴 때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어떤 길을 걷든 어떤 삶을 살든 전 선생님 편입니다.
꼭 뜻하시는 바를 이루어 모든 사람들 앞에 보란듯이 증명하시길 바랍니다.”

이번에 받은 첫 월급의 일부를 선생님께 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요,
모든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의 자랑입니다.
고마운 우리 아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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