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26.달날. 맑음

조회 수 1199 추천 수 0 2008.06.02 07:43:00

2008. 5.26.달날. 맑음


“엄마, 눈 와요.”
그래, 눈이 오고도 남을 이곳이라 우리는 별로 놀라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정말 눈이래도 말입니다.
밖에 나가 보지요.
말간 하늘입니다.
바람 조금 불고 있었지요.
학교 본관 뒤란 밤나무, 은백양나무,
그 사이 커다란 아카시아나무에서 꽃이 마당으로 날리고 있었습니다.
눈(雪)은 가는 겨울 자락을 붙들고 오래 서성이더니
이렇게 온 계절에 다시 옵니다,
봄날엔 살구꽃잎으로,
곧 아카시아꽃잎으로,
나비가 가는 봄이 아쉬워 열무꽃잎으로 다시 태어나듯이.
가는 것들은 늘 그리 아쉬운 거지요.
우리들의 어린 날이 가고
우리들의 젊은 날이 가고
우리 생이 가고...

책방 바깥문 앞에는 모종포트가 널려 있습니다.
거기 풍원콩, 호박, 옥수수 씨를 심었고
싹이 오르고 있지요.
한켠에선 포도나무 자른 가지가 꽂혀 있습니다.
소사아저씨가 봄 들머리에 해 놓은 것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잖은 마른 나무에서
싹이 나고 잎이 제법 돋았지요.
아무리 봐도 신기하고 신비롭습니다.
내년에 늙은 나무를 좀 패내고 이를 심을 거지요.
젊은할아버지는 모돌리기를 하고 있고
(간간이 이앙기가 지나가지 못한 곳,
혹은 좀 약한 곳에 모를 꽂는 일을 그리 일컫습니다.),
종대샘은 밀양에 흙벽돌기계를 가지러 갔지요.
그걸로 생태화장실 지을 겁니다.

좋은 자연 안에서,
좋은 사람들과 모여,
날마다 명상하고 수련하며 산다 하니
흔히 그런 말씀들을 하십니다.
“당신은 노여워할 일이 없을 것 같애요.”
무슨! 거, 다, 환상입니다, 똑같지요.
다만 여기 삶이 그것을 빨리 알아차리게 하고
잘 들여다보게 하고
그리고 좀 더 잘 내려놓게 하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까요.
오늘만 해도...
오후에 아이를 싣고 읍내 병원에 들렀다가
잠시 어느 행사를 주관하셨던 교수님 한 분 만났습니다.
행사의 아주 작은 귀퉁이 하나를 맡아서 일을 했더랬지요.
그런데 뜻밖의 소리를 듣습니다.
다들 바쁜데,
차라리 망연히 앉아있었던 학생들은 거슬릴 게 없었는데,
컴퓨터 켜놓고 자기 일 보는 제가 ‘거슬렸다’ 합니다.
허허 참...
“나가서 북 좀 치세요.”
그 날 북을 잘 쳐서 부른 게 아니라,
거슬렸기 때문에 컴퓨터 앞에 앉았지 말고 나가라고 했단 것도
늦게야, 얘기를 듣고서야 알아차렸지요.
최선을 다했고, 할 바를 다했고, 행사 잘 치렀는데,
지나간 일에 대해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길 들은 겁니다,
일이란 게 늘 의도한 대로 되지 않고,
애쓴 만큼 결과 또한 얻는 게 아니란 거야 어디 새삼스러울까만.
그런데, 방을 나와, 시간이 흐를수록 노기가 일었습니다.
기가 막히데요.

그날! 5월 14일 물날, 날아다녔노라고 ‘물꼬요새’에 썼습니다.
놀라고 아픈,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를 달래며 애가 탄 남편의 문자,
다음 일을 기다리며 그날 마감하는 제자의 추천서를 급히 쓰던 노트북,
일을 하다 밀쳐놓고 좇아갔던 강의실,
다시 달려와 돌리던 재봉틀,
모두가 저녁을 먹으러 여기저기서 부르며 나섰을 때
혼자 텅 빈 그 큰 극장에서 시간과 다투며 앉았던 재봉틀 앞,
버스를 타고 나온 아이들을 만나러 달려가던 5분전 7시,
도저히 안 되겠다 담당교수님께 연락드리고
점심처럼 저녁도 넘기고 아이들한테 좇아가던 일,
국선도가 끝난 아이들을 싣고 다시 달려가던 밤 9시의 극장,
그리고 병원 좇아가고 아이들 끌고 대해리 들어오니
열한 시가 다 되었더랬습니다.
뭘 먹기도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요.
아이들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샘이랑 다녀서 좋았다고, 괜찮다고,
샘이 바쁜데도 애써주셔서 고맙다고 위로해주었습니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애들이 낫습니다, 아암요.

왜 그때 그가 그렇게 있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으리라 믿지 못하는지요,
그이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신뢰를 갖지 못하는지요?
야속하데요.
심지어 사람을 어찌 보고 그러나 싶더이다.
컴퓨터(이게 뭐 노닥거리는 도구입니까)를 다른 공간에 가서,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했어야 옳았다고 주장할 게 아니라
당신 정말 애썼군요, 아이는 이제 괜찮은가요, 말할 수는 없었을까요?
그런 말을 듣고 있어서 제가 더 민망하고
제 생이 안타까웠습니다.
왜 사정을 말하지 않았냐고 하데요.
어떻게 다 말을 하고 사나요,
때로는 말 없어도 헤아리기도 하면서,
잘 모를 땐 그래도 그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을 거라 넘겨짚으며
그리 살아가는 것 아니겠는지요.

대해리로 돌아오는 차에서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요.
말하자면 죽어라 일하고 욕먹은 겁니다.
자기 고생이 컸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작은 비판 혹은 비난에도 반응이 커지는 법이지요.
행사가 끝나고 문자를 보내준 교수님이 계십니다.
‘어려운 중에도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는 좀 괜찮은지, 사랑과 축복을 보냅니다.’
제가 마땅히 할 일이었는데 이리 마무리를 하는 분이 계시는가 하면
이렇게 불편해하는 분도 계십디다.
참 세상 일이 다 제 눈, 제 편에서 읽혀지기 마련이지요.
그래도 내내 오해하고 불편해 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말해주어 고마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기운으로 불편함은 전해질 것이니.

모두가 최선을 다해 살고 있습니다,
혹 내 맘에 안들 수도 있고
내 눈에 안찰 수도 있지만
‘그(누구나)’ 역시
처절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식구들 저녁 밥상을 차려주고
해거름녘 고구마순을 다시 놓았습니다.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타들어간 게 여럿이었지요.
심느라고 심지만 막바지 순이어 영 부실하지만
그래도 놓아보는 겁니다.
덥던 기세가 꺾이고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지요.
허리를 펴며
해 꼴딱 넘어가자 말 많아진 개구리들과
둘러친 산그림자로 위로받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살아서 고맙습니다.
모든 건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피식, 올랐던 노기가 멋쩍었지요.
‘거슬렸던’ 당신 역시도 행사를 주관하시느라 날이 서 있어 그랬을 겝니다,
여전히 그분을 존경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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