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21.물날. 맑음

조회 수 1201 추천 수 0 2008.06.01 00:01:00
2008. 5.21.물날. 맑음


‘며칠을 집에 가지 못하고 있구나...’
먹는 건 어찌들 하고 지내시는지,
논밭은 어찌 돼 가고 있을지요.

병원에서 영동대가 가까워
잠시 좇아가서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옵니다.
지역에 이런 대학 하나 있는 것도 얼마나 고마운지요.
영화도 빌려오지요,
오래된 고전 (밀코 만체브스키 Milcho Manchevski/1994).
Words, Faces, Pictures,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는 세 이야기가
시간의 서커스를 타며 어느 순간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마케도니아 언덕의 폭력이 런던의 레스토랑에 있는 이와 이어지고,
자미라와 키릴의 사진이 나오는 Faces에서 Words에서의 키릴의 전화가 걸려오고,
Words에서 알렉산더의 장례식에 Fictures의 앤이 참석을 하고...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줄거리를 잡아보려다
그만 어느 순간 끊임없이 순환되는 고리를 퍼뜩 알아차리게 되지요.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인종간의 증오와 그 영향에 관한 이 이야기들은
누구말대로 평화의 약속은 지키기 어렵지만 폭력의 약속은 지켜진다는
인류의 비극을 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시로 그려냅니다.
증오와 총질의 악순환은 계속되고,
영화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거 어떻게 끊을래?”
늙은 수도승은 키릴에게 그랬던가요.
"시간은 지나가지. 원은 항상 둥근 것이 아니야."
("시간은 절대 죽지 않는다. 원은 둥글지 않다."고
런던 거리 어느 벽에도 그리 쓰여 있었지요.)

오늘 아침은
병원 식당 아줌마가 아침밥상을 하나 더 들여보내주었습니다,
챙겨먹으라고.
간간이 겨우 인사나 잘 드렸을 뿐인데,
겨우 빵 한 조각 나눠드렸을 뿐인데...
우리 생은 언제나 이렇게 주는 것보다 받는 게 많습니다.

대해리 소식이 옵니다.
동네 또 한 집이 이사를 갔답니다.
이사를 들어오는 이들은 거의 없고
어쩌다 젊은 사람들이 나타나 보지만 오래 못 견디고 그렇게 떠납니다.
멀거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높다란 이삿짐 차를 보라볼 뿐이지요.
두 달 만에 다시 떠나는 가정입니다.
어디서고 잘 살길,
바라는 곳에서 뿌리 잘 내리길.
해외자원봉사 추천서를 써주었던 소희로부터
합격 발표가 났다 연락이 오기도 했습니다.
요새는 워낙에들 나가려 해서
그런 것도 경쟁률이 세다는데,
잘 됐습니다, 잘 됐습니다.
돌아와 그 길로 대해리 내려와 손발 보탠다 합니다.

아, 오늘 잠시 강의 하나를 나갔다 왔는데,
그 사이 사이에 병원에 좇아와 아이 오줌통을 비워주면서,
오줌통을 들고 있는 아이를 놓고 갈 만큼 정녕 가치가 있는가,
흔들려 하고 있었지요.
시작한 일이어 끝을 맺자 하였는데,
어찌 될지...
비단 지난 주 있었던 한 수업 때문만은 아니지요.
학교라는 곳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대로
여전히 학교는 갑갑한 곳이데요.
이것만이 옳아 라는 교조주의로 비치기도 하고,
발표자에 대한 교수님의 비판이 비난으로 들리기도 하여
나는 혹여 아이들에게 그렇게 ‘평가’하지 않았나 반성도 하고...
그리고 또 다른 한 장면.
꼬마 아이들이 사대를 찾아와서 교수님께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이 대답해 줄게요.”
물론 우리도 흔히 그렇게 하지요,
아이들 편에 서서 말하다 보면.
“엄마가 해줄게.”
“선생님이 해줄게요.”
하지만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지 않던가요.
만연하게 쓰인다 하여 우리가 그 말법을 다 인정할 수는 없지 않을지요.
우리말에서 자기부름말에 존칭은 없습니다.
일찍이 이오덕선생님이 경계하여 강조하셨던 부분이기도 하지요.
(어느 분이 전화주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호칭과 직위로 그리 불릴 수도 있다’ 고쳐주셨는데,
중요한 건 그 말이
정말 자기존칭으로 쓰였느냐, 직위로 쓰였냐 하는 문제이겠네요.)
“교수님이 대답해 줄게요.”
그것보다는 이렇게 쓰는 게 더 올바르지 않을지...
“제가 대답해 줄게요.”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흔들리며 또 자리를 잡아가고 그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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