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4.19.흙날. 맑음

조회 수 1257 추천 수 0 2008.05.11 07:04:00

2008. 4.19.흙날. 맑음


아이는 ‘4.19’라고 날적이(일기장)에 크게 적어놓았습니다.
재평가되고 있는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셋을 담은 시디를 보고
잠깐 얘기 나눴지요.
어떤 이에게는
거대하게 분출되는 결집한 민중의 힘을 통해 승리감을 주었던 역사가,
한편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통해
어떤 이에게는 좌절을 주었던 역사가,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던졌을까요?
셈놀이를 하고 아이들은 수영을 다녀왔고,
오후 2시엔 채민네가 와서 같이 판소리도 하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잔치 준비에 들어섰습니다.
오늘부터는 이불빨래를 젊은할아버지가 이어갑니다.
그동안 치워내던 돌무데기 일이 끝이 났지요.
물론 일찍부터 부엌샘이 차근차근 해왔던 빨래입니다.
“일과가 잡혀갈 만하면 뭐가 있고
산만하게 하루하루가 가는 느낌...
쉰 것도 아닌데 내 생각만큼 일이 진척 없고
1주일, 매일, 할 일을 짰는데...”
부엌샘이 그러데요.
그렇게 날이 가는 게지요.
결합한지 얼마나 되잖은 부엌샘은
적은 사람들로 많은 일을 앞에 놓고 있는 물꼬의 요새 생활이 버거울 수도 있을 텐데
곧잘 힘을 내며 나아갑니다.
"부엌은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할 테니까."
그 씩씩함이 다른 이에게 힘이 되기도 하지요.
얼마나 고맙던지요.
안인경님은 손으로 만든 주방세제를 담고 있고,
종대샘은 늦도록 떼지 못한 창문 비닐을 드디어 떼고 있습니다.
이곳의 밤은 자주 겨울이어서
5월이 지나도록 붙여두는 것인데
마침 잔치 앞이기도 하여 묵은 먼지 털 듯 떼기로 했더랍니다.
서울에서 전영화님으로부터 잔치리플렛이 도착하기도 했네요.
어제는 갓 딴 버섯을 보내드렸더랍니다,
그게 무슨 답례가 될 수 있을까만.
달골 창고동 모퉁이가 굵은 전기선에 당겨 구겨진 곳이 있어
공사를 맡았던 정부장님이 다녀가신 일도 있었습니다.

저녁에 직지성보박물관에 다녀옵니다.
큰 안내자이신 흥선스님과 문화계 여러 어르신이 달에 한 차례 모이는 모임으로
오래 걸음하지 못 했더랬습니다.
마침 물꼬 논두렁인 선배를 거기서 만나기로 했고,
오랜만에 여러 어른들께 인사도 하러 겸사겸사 간 게지요.
조각가 박충흠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대학교수 자리를 떠나
파리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피폐한(?) 시골동네를 배경으로
가난하게 살았던 한 시절이 끼친 영향이 크셨던가 봅니다.
먹고 살려고 물고기를 잡고 씨를 뿌리고 떡잎이 자라는 걸 보며
‘내가 헛살았구나’ 싶었더라지요.
“어느 날 들에서 소나기를 만났는데,
비가 지나고,... 나뭇잎들이 반짝거리고... 눈물이 나더라구요.
그리고 가슴이 시원해졌는데, ...
숲이구나, 나무가 이렇구나, 평생 잊지 못할 광경...
섭리, 경외가 이런 거구나, 내가 너무도 작은 존재...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당신이 만났던 그 시간이 바로 살아 숨쉬는 경이 아니었을지요.
‘한 번 정화의 과정’이라 표현하셨습니다.
“지난 시절 폼나게 할려고 고민했던, 공간을 쭈욱 차지하고,
누구 영향 누구 형태를 좇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없더라구요.
평정한 상태, 욕심을 버렸던 시기가 아니었나...”
파리에서 돌아오며, 어디서라도 작업할 수 있겠구나 깨달았다십니다.

이즈음의 제 생각이랑 닿아있어
사진으로 보여준 작품들보다 가난의 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더 진한 감동으로 왔나 봅니다,
그래요, 뭐라도 할 수 있겠구나,
어떻게든 잘 살아갈 수 있겠구나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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