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자 96 첫날, 8월 2일

조회 수 1467 추천 수 0 2004.08.06 02:45:00

< 잊히지 않을 까닭 >

산길 아니어도 깊은 들길을 걷노라면 번번이 고개를 뚤래뚤래 하게 됩니다.
솔솔 코끝을 스치는 향내로.
영락없이 칡꽃입니다.
'칡꽃 허벅진 산길 따라'
그렇게 제목을 놓고 시작하는 아흔 여섯 번째 계절자유학교(계자)지요.
아이 마흔 둘과 어른 열 여섯(새끼일꾼 넷 더해)이 함께 합니다.
물꼬의 계자는 늘 다녀갔던 아이들이 많은 편입니다.
아이들이 너무 오래 기다려왔거나
지독한 설렘으로 낸 소문에 친구들도 딸려오거나
(부모님들 역시 오래 찾아보고 기다려서 보내거나).
그런데 이번엔 낯선 얼굴들이 많습니다.
역시 방송의 영향권 아닌가 짐작해보지요.
그래서 간절한 기다림으로 오는 아이들 무리와 달리,
말하자면 물꼬 계자의 소중함(?)을 아직 잘 모르는 아해들이 많다 이거지요.
뭐 지내보면 모를 리 없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또 다른 특징 하나,
장애등급을 가진 아이가 셋인데다
행동과다증 혹은 여러 증상으로 분류됨직한 아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딴 때보다 두 배는 되는 수지요.
물꼬가 가진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 알려진 까닭이겠습니다.
(장애아의 비율을 왜 퍼센트로 따져서 입학시켜야 하는가,
누구나 장애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가,
장애인의 삶은 우리 모두 공동으로 질 책임이다...)
그렇게 일곱 살 다섯, 저학년 스물 넷, 고학년 열 셋 아이들이랍니다.

기차를 함께 타고 오는 두 시간 반은
서로를 익히는 중요한 자리로서 프로그램 아닌 프로그램입니다.
일이 왜 없고 탈은 또 왜 없겠는지요,
무엇보다 얼마나 많은 말들이 넘치고 또 넘치겠는지요.
정후가 자유학교 물꼬 상설학교 한해살이를 듣더니 그랬답니다.
"공평하네, 방학 여섯 달, 공부 여섯 달."
일곱 살 경은이가 여느 사내아이처럼 머리를 바짝 자르고 왔습니다.
남자라고 놀리는 아이도 있었겠지요.
"귀엽지 않냐?"
"귀여워요."
정호준이 그랬답니다.
그래 얼른 상범샘이
"야, 그래 호준아, 너 참 눈 좋다." 그랬다는데
한참 지나 우리의 정호준 선수,
"저 눈 나쁜데요, 이쪽은..."
시력을 얘기 하더라나요.
영동역에선 새끼일꾼 기표가 서울에서 오는 덩어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묻더라지요, 영동역으로는 누구누구 오냐고.
비록 한 아이만을 겨우 챙기고 있었다지만
제 몫을 하려 뎀비는 멋진 새끼일꾼들의 한 모습이지요.
학교로 들어온 아이들은 점심 때건지기에 이어지는 한껏맘껏 동안
구석구석 낯도 익히고 자전거를 타거나 책방에 스미고
더러 잠자리나 매미를 좇아다녔습니다.
아, 물놀이,
들일 데 없어 밖에다 둔 우리들의 수영장 말입니다,
여한 없다 하리 만치 물장구를 쳤더랍니다.

오후엔 숲에서 보냈습니다.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하고 산책로가 고이 이어진,
숲이라면 그런 그림이 먼저겠습니다만
웬걸요, 말이 그렇지 이건 숫제 잡풀 엉킬대로 엉킨 거친 숲이지요.
날 몹시도 찌는데
뭐가 있는지 그 궁금함으로 오르던 산길이었습니다.
"선생님!"
찢어지는 소립니다.
벌이예요.
산길 큰 바위틈 토종벌통 둘 있는데,
누군가 돌이라도 던진 모양입니다.
주인들이 아이들에게 화가 났겠지요.
그 앞을 지나치며 쏘인 이들,
그래도 오겠다 오고 또 오며 쏘인 이들로
숲에선 눈물바다였지요.
마지막 남은 열호를 데려오다 기어이 저도 쏘이고 말았네요.
겁먹은 그가 어쩔 줄을 몰라 채근해도 더디고 더딘 걸음이어
그네를 피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침이 혹 남겨져있진 않나 구석구석 살피고
땀도 식히며 숨을 골랐습니다.
금방 쓰러질 만큼 자극을 받은 이는 다행히 없습니다.
세상에, 열댓명이네요.
우진이, 절대 절대 잊히지 않을 계자랍디다.
허벅지 앞뒤로 쏘였거든요.
그 길로 못간다 하고 걱정하는 아이들이 반가웠습니다.
길 없는 숲을 헤쳐나가는 진한 느낌을 나누고팠거든요.
아이들과 거친 상황에 있을 때면
꼭 레오 리오니의 '내 꺼야(사실은 '우리 꺼야'가 더 잘 어울릴)'가 생각납니다.
내 꺼라고 그토록 싸우던 무지개연못의 세 친구가
홍수 속에서 함께 견딘 뒤로 '우리 꺼야'를 배운.
어려움은 대개 함께 있는 이들을 엮어주는 좋은 계기가 되지요.
아이들 또한 숲길에서 그랬습니다.
어찌나 서로를 잘 끌고 당기던지요.
벌에 쏘였을 때부터 마지막 걸음까지 울음을 그치지 못하던 일곱 살 해인,
학교에 닿자 세수 한판 하고 와서
말간 얼굴로 앞에 와 환히 웃데요.
어려움은 각자에게 그런 뿌듯함을 남깁디다.
낯선 관계들이 많은 이번 계자,
그래서 첫날부터 좀 울퉁불퉁하게 가자 하던 계획이었던 게지요.
참, 개울을 따라 내려오다 만난 소나기 얘기도 뺄 수가 없네요.
우리가 들어선 아주 아주 커다란 감나무 아래,
그 바깥 지름 10m안에만 비가 떨어지는 겁니다.
신기해라 넋나가 있던 아이들,
이제 충분히 우리를 거두고 선 감나무에 놀라서 입다물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풍성한 이 자연인지요.

저녁 먹고 잠시 피아노가 있는 작은 무대에서 옹기종기 앉았더랬는데
"선생님은 꿈이 뭐였어요, 선생님이었어요?"
"응, 어찌 알았을까? 아버지처럼 선생님이 되고 싶고 시를 쓰고 싶었어.
그리고 자유학교를 열고 싶었지.
그런데 이제 다 해버려 할 일이 없네."
"이제 경찰, 이런 거 해보세요?"
용수였던가요...

대동놀이의 열기야 두말해 무엇하려구요,
것땜에 여긴 온다는 아이들도 숱하니.
물꼬, 애들이 벌써 눈치채버렸습니다, 남은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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