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17.흙날.맑다 눈 / 차, 뒤집히다

조회 수 1466 추천 수 0 2005.12.19 11:35:00

2005.12.17.흙날.맑다 눈 / 차, 뒤집히다

눈이 꽤 올 모양이지요.
가벼이 흩날리는 눈을 이고 학교를 나섰습니다.
이번 학기 마지막 읍내 춤추러 나가는 길이지요.
상림샘이 젤 좋아한다는, 우리 닭이 낳은 달걀도 찌고
부엌에서 김현덕엄마랑 희정샘이 만든 마른 국화 주머니랑
먹을 것도 잔뜩 실어 갤로퍼가 갑니다.
동교동 지하 카펫 위에서 연극하며 뒹굴던, 뱃속에 아이를 키우던 시간을
곁에 앉은 나현이랑 나누기도 하였지요.
막 학교 앞 삼거리를 지나는데,
어, 어, 어,
우리 빌어 짓던 포도밭 모퉁이를 향해 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합니다.
에구, 4륜 구동이면 뭐 하나요, 기어를 바꿔놓지 않았는 걸.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워낙에 느리게 가고 있었던 거지요.
간신히 커브길을 벗어나겠다 싶은데
이런, 바퀴 하나가 이미 포장한 도로 아래로 내려가 있습니다.
최대한 휠을 꺾어보지만 때가 늦었습니다.
"괜찮을 거야!"
"어떡해요?"
"내가 다 구해줄 거야!"
"옥샘, 믿어요!"
"네, 네, 믿어요!"
차는 한동안 대롱거리다 아래로 굴렀지요.
아찔했습니다.
세상에, 순간 시내가 아니라는 것만이 더 없이 고마웠습니다.
깨진 유리와 날카로운 돌로 2차 3차 상처들을 입었을 테니까요.
고요했습니다.
새로운 세계로 떨어진 듯하였지요.

"옥샘, 괜찮아요?"
아이들이 먼저 안녕을 물어왔습니다.
의리지요.
이어 벌써 무용담이 터져 나올 판이었습니다, 말짱하다 싶으니.
"Stop!"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아이들은 압니다.
모두 침묵하며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안내자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거지요.
창대비 속, 돌이 물에 얽혀 코앞으로 굴러 내려오는 가파른 길에 서서도
자칫 헛디디면 천길 아래로 굴러 떨어질 얼음바위 위에서도
길을 잃은 깊은 산속의 어둠 속에서도 그러했고,
우리는 살았습니다.
아, 그런데 우리의 채규선수,
"나, 먼저 나가면 안돼요? 빨랑 시동 걸어 봐요."
와아, 정말이지 질려버렸습니다.
안전에 대한 확인 다음의 행동을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그 진지한 순간에 말입니다.
"연락부터 하자."
찬바람 부는 한 데로 무턱대고 나서기보다
몸이고 먼저 살피며 사람을 부르는 게 낫겠다 했지요.
대해리에서 도통 연결되지 않던 제 손전화가
다행히 학교 손전화로 연결되었고
상림샘한테며 이곳저곳 연락을 부탁하는 사이
영양에서 들어오던 김상철아빠가 우리를 발견했고
곧 학교에서도 사람들이 내려왔더랍니다.

이렇게 쓰고 앉았을 수 있으니
몸이 좀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말짱하단 증거겠지요.
물론 아이들, 예, 늘 그렇듯이 하늘이 도왔습지요.
어느 누구도 손톱 하나 긁히지 않았답니다.
사는 게 고-맙-지요.

그런데,
아이들을 먼저 내보낸 뒤 그제야 힘이 다 빠져 엎어진 차에 털썩 주저앉아
저는 제 생애 또 하나의 변화기를 맞고 잊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러다 정말 사람 잡겠다.
이제 물꼬일 고만해야 되잖을까...'
감정이 갈 때까지 가고 뭔가 무리하게 밀고 가는 듯한 느낌이
최근 컸더라지요.
태생적 한계(멀리서 아이를 보내는)를 가진 밥알 1기들과
뭔가 대단원의 결론이 필요하지 않나 절박해지던 요즘이었더이다
(게다 제 소양에 대한 스스로의 '깊이 들여다보기'가 차갑게 진행되고 있었지요).
지난 두 해, 열심히 했고 충분히 즐거웠지요.
이제 다른 질이 아니라면 더는 밀고 갈 힘이 없는 우울한 지점에 서 있습니다.
지난 춘천나들이에서 일찌감치 정해졌던 길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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