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5.16.물날. 비

조회 수 1190 추천 수 0 2007.05.31 08:10:00

2007. 5.16.물날. 비


제게도 스승이 있습니다.
길눈을 밝혀주시는 분도 있고
어머니처럼 품이 되어 위로와 위안을 주는 분도 계시지요.
“그냥 가기 섭섭해서...”
스승의 날이야 이래저래 오는 인사로 번거로우실까
하루 지나 안부를 여쭈었습니다.
오늘 한 선생님은
칭하이 무상사의 <즉각 깨닫는 열쇠> 어느 구절을 흘려주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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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곳에 왔는가?

칭하이 무상사


불교 경전에 따르면
“우리가 부처이고 불성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하느님이 우리의 사원 안에 거하신다.”고 쓰여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 안에 신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몸이 신의 사원이고 신이 그곳에 거하는 유일한 존재라면,
우리가 곧 신이지 않겠어요?
만약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신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신들 중의 최고의 신으로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우리는 그 선택을 존중해줘야 합니다.
모든 존재의 아버지이자 어머니로서
자신이 성스러운 존재임을 인식하기 위해 어떠한 것을 선택했든,
어떠한 것을 소망했든 우리는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걸어가기로 택한 삶의 행로를 알지 못하니까요.
그들은 신의 성품을 알기 위해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고,
또 겉으로 보기에는 나쁜 사람인 듯 보이거나 아주 저급한,
소위 말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 선택은 그들이 신성을 알아가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식입니다.
신답지 못한 것을 선택함으로써,
언젠가는 그것이 진정한 자신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되고,
그때 그들은 되돌아가서 존재의 모든 것을 다시 새로이 배워야 하지요.
우리가 항상 천국에 머물면서 신으로만 지낸다면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특별히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스스로를 낮추어서 이 물질세계로 내려온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위대한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고 또한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이곳에 왔는가’에 대한 대답은
‘자신의 신을 인식하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시간이 되었다고 느끼는 그때가 되면,
자신의 본성을 다시 기억하기로 선택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빨리 기억해내기 위해
선지식(善知識)이나 수행단체 또는 영적스승을 찾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기억을 되찾아야 하는지
어디를 주시해야 할지를 잊었으므로,
이미 기억해 낸 친구가 있으면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면
자신이 가장 지고의 존재인 신일 뿐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님을 자각하게 되고,
또한 무상(無上)한 존재가 이 몸 안에 거한다는 것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신이 이 몸 안에만 거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도 역시 신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영적인 용어는 과학처럼 아주 정확하게 표현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군요.
그러니 스승이 신에 대해 아무리 많은 것을 알려준대도,
또 선지식이 본성에 대해 아무리 유창하게 설명해 준다 할지라도
법문을 경청하는 것만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스승이나 안내자 또는 벗이 있어,
우리에게 단지 이론만 들려주는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가르쳐줘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가 우리 행성에 왔을 때,
그는 제자들을 이론(교리)과 실제(수행), 두 가지 방식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한 교화방식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입문한 제자들도 기적을 행하고 천국을 볼 수 있었으며,
창조주의 말씀인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천국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천국에 오를 수도 있고 심지어 천사나 하느님을 볼 수 있었고,
또 아버지 하느님이 모세에게 말을 한 것처럼
그들에게도 말했으며 천사들도 그들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위대했던 것만큼 우리도 역시 위대하니까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예수가 말했으므로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가 잊고 있어서 때때로 한두 사람의 벗이 와서
우리를 상기시켜 주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때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어느 누구라도 우리에게 그리 많은 것을 해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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