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건지기 뒤 오래오래 햇발동 청소를 하다.

쓸고 걸레질을 하고

거풍했던 이불들을 방마다 적절하게 배치하느라 1층과 2층을 오르내리고.

 

이런! 학교로 서둘러 내려와 전체 상황을 점검하지 않으면 꼭 이런 일을 만난다.

무대에 공연 올리기 직전에 일어나는 사고 같은.

! 라디에이터가 고장 나 온기가 없는 욕실에서 벌어진.

양변기가 얼지 않게 흘러넘치게 해 둔 물이 밖으로도 조금씩 넘었는데

그게 욕실 바닥에 얇게 얼음을 이루고 있는.

빙판이다.

사람들은 곧 들어오는데, 아쿠, 머리야!

지금쯤은 부엌으로 들어가 밥을 지을 준비를 해야는데.

저 안에 벽에서도 얼어서 터졌는가.

그런데 그제야 시커먼 욕실화 하나와 역시 그만큼 까만 부엌 신발 하나가 보이는 거라.

그런 거 안 하려고 일찍부터 천천히 많이 움직였지만

후다닥, 결국 또 그리 움직일 일이 생기고 만다.

후다닥, 그 순간 얼마나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되는지.

몸을 빼지 못해도 장을 보지 않을 수는 없다.

몇 가지 신선하게 바로 사들여야 하는 게 있는데,

면소재지 농협마트를 서둘러, 그야말로 재빠르게 다녀오다.

 

늘 물꼬 일정이란 안에 있는 이들만 준비하는 게 아니다.

이용샘이 귤을 두 상자 보내주었다. 지난 계자에도 세 상자를 보내주셨더랬다.

이웃에서 아주아주 좋은 흑화고를 들여주었고,

얼마 전엔 전복이 넉넉하게 와서 절반을 잘 손질해 얼려두었다.

놓쳐 사지 못했던 고구마는 인교샘이 들어오는 편에 실어 왔다.

 

버스에서 몇 사람이 올라 서로 잘 만나 오는 중이라 문자를 보낼 줄 알았는데,

! 달랑 두 사람이다.

첫걸음하는 지윤샘, 그리고 류옥하다샘.

가게에 확진자가 다녀갔는데, 진단키트는 음성이나 혹시나 싶어 희중샘은 걸음을 접기로 했고,

세영샘은 기숙학원 입소와 날이 겹쳐 수년만의 물꼬행이 막혔다.

작년부터 물꼬 첫걸음을 엿보던 김지윤샘과 김미향샘은

이번에도 사정이 생기고 말았네.

지인샘은 윤호샘네 식구 셋이 오는 차편에 동행하게 되었다나.

그나저나 차로 오니 실려 오는 게 어찌나 많던지.

다음에도 꼭 차로 오십사 해야겠을세, 하하.

재훈샘은 저녁 일이 끝나고 출발해서 자정을 넘겨서야 온다 했고.

전체 안내를 하고 잠시들 고단을 푸는 동안 저녁밥상을 냈다.

흑화고 전골이라. 곱게도 전골 위에 얹힌 흑화고라.

지윤샘이 해온 반찬도 더해 배식대에 올랐다.

묻었던 배추김치는 꺼내왔다.

밥상을 물리고 차를 달였네.

마침 난로 위에 군고구마가 우리를 불러세웠기도.

 

실타래’.

숙제검사 해야지요!”

준비한 자기 이야기들을 안고 둘러앉았다.

뒤란에서는 학교아저씨가 본관에 불을 때고 계셨다.

집단상담에 가까운 이 시간을 시작할 때 건호 형님이 잊고 있었던 걸 짚어주었다.

우리가 안전한 동그라미를 만들고, 깊은 경청과 침묵이 동행해야 한다는 걸.

이곳에서 꺼낸 이야기로 이후 서로 멋쩍어지거나

혹 타인에게 전해지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말이기도.

오래 여러 일정에 함께했던 그가,

특히 청소년 계자에서 우리가 자신의 속내를 꺼낼 수 있던 전제를 상기시켜준.

자기소개부터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또 각자 얼마쯤의 변화를 안고 있을 테니까.

자기소개는 현재 지금을 점검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지윤샘은 어릴 적부터의 온 생을 훑었는데,

덕분에 우리들의 어린 날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우리는 어제와 다른 나로 오늘을 살고, 또한 어제의 연속성으로 내일을 사는.

거기 어디쯤 내 좌표가 있는지 확인하는.

준비한 몇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고, 절반은 내일 밤에 잇기로 했다.

 

단법석’.

가마솥방에 사람들이 마련해온 먹을거리가 푸졌다.

물꼬 노래집 <메아리>도 챙기지 않을 수 없었지.

야삼경 재훈샘도 무사히 들어오고

밤늦게 먼 길 달려온 그를 위해 또 뭔가를 끓여내고 같이들 먹고.

그리고 달골에 차를 타고 오르거나 걷거나.

 

저녁밥상을 차릴 때였던가, 한 사람이 부엌으로 들어서서 대파를 썰어주었다.

뭘 좀 할까요 하며 도마 위에 놓인 파를 보고서.

그런데, 내가 필요한 건 어슷썰기였는데 총총 썰어놓고 갔다.

그래봤자 파는 파지, 어딘가 필요한 곳에 들어가겠지.

하지만 음식을 마련하는 이는 자기 규모를 지니고 있잖은가.

그때 나는 내 친절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친절이 아니라.

어디 가서라도 돕자는 좋은 마음으로 쑥 들어가서 일을 척척 하고는 하는데,

그것이 실제 사람 사이 거리를 없애기도 하고 실제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 어떤 경우엔 내 친절이 무례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새삼 한 거라.

눈치를 보는 것과 달리 세심한 살핌에 대해 생각하다.

타인의 행위에는 선의를 먼저 보고, 내 행동에는 섬세함을 먼저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결론. 역시 만나야 한다. 잘 모였다.

며칠 전까지 망설였다, 이 일정을 진행해야는지 말아야 하는지.

아니, 할 수 있는가 마는가 하고.

코로나19 때문은 아니고. 그 속에도 지난 2년 우리는 일정을 단 한 번도 취소하지 않고 해왔으니.

진행자의 신상 때문이었다. 작은 수술을 하고 회복이 더디고,

수술을 또 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여 긴장도 했다.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고,

일정도 진행할 만했고.

대신 먼지를 더 닦아내지 못하기는 했을.

그런 거(청소 안한 거) 남은 잘 모르는데,

해도 해도 윤도 안 나는 낡은 살림인데.

내가 알잖아!”

내가 아는것 때문에 우리는 또 자신을 정갈하게 가꾸는 것 아니겠는지.

넘들 다 몰라도 나는 알잖은가!

내 사랑도 나는 안다. 내 품도 나는 안다. 꾸밀 수 있지만 나를 기만할 수는 없다.

한 생을 잘 가꾸고 살고자 하는 밤.

 

코로나19 음성판정을 받은 이들만 모이기로 했다.

안전하리라 바라지만 걱정과 긴장을 일정이 끝날 때까지 놓지 못할.

그 아슬아슬한 시간을 꼬박 지난 두 해 건너왔다.

무사했다. 고마운 삶이다. 기적이다.

이번 일정 역시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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