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3. 7.물날. 마른 눈발 날리는 아침

조회 수 1159 추천 수 0 2007.03.21 20:03:00

2007. 3. 7.물날. 마른 눈발 날리는 아침


마른 눈입니다.
새벽에 내렸던 눈이 바람에 포슬거리는 아침입니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처럼 날리고 또 날립니다.

아이들이 신문지로 연을 만들었습니다.
옥상에 올라 날렸지요.
“엄마 아빠가 오래 살게 해주세요...”
꼬깃꼬깃 소원문도 달았습니다.
정월대보름, 자신의 액을 쓴 연을 날리다
마지막 순간 줄을 끊으면 뵈지 않는 곳까지 연이 날았지요.
그러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새해를 살아감직한 힘이 꿈틀거렸을 겝니다.
그것이 아이들에게는 겨울놀이의 끝이었고,
어른들은 여유로왔던 긴 겨울과 작별하기 못내 아쉬워
귀신의 날로 하루를 더 미적거리다
구들장 뒤로 하고 논밭으로 걸음을 떼던 게 대보름이었지요.

권정생샘의 동화 한 편을 아이들과 읽습니다.
미사나 영성체(예수님의 몸과 하나가 되는 것) 같은 걸
왜 사람끼리만 해야 하는지 괴로워진 신부님과,
하느님도 성당 안에만 있지 말고
산 중턱 저만치 조그맣게 보이는 저런 집에 나와 살면 좋겠다는 강아지가
같이 농사짓고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폭격으로 집이 불타고 총으로 서로 죽이고 식구들이 헤어진
어린 날의 기억을 가진 신부님과
사람들이 놓은 덫에 한 다리를 잃은 강아지였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강아지나 토끼나 산에 사는 노루나 늑대나 호랑이나
모든 짐승들은 사람들이 벌이는 그 무시무시한 전쟁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잖아요.
총칼도 안 만들고, 핵폭탄도 안 만들고, 거짓말도 안 하고,
화도 안 내고, 몰래 카메라가 없어도 도둑질도 안 하고,
술주정뱅이도 없고, 가짜 참기름도 안 만들고,
덫을 놓아 약한 짐승도 안 잡고,
쓰레기도 안 버리고요.”(같은 책에서)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영동을 걷고 있는 지금,
아이들과 나누기에 참 좋은 이야기였지요.

오래 전 떠났다 장례차를 타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침 녘 운구차를 따라 몇 대의 차들이 줄줄이 들어오더니
저 건너 앞산에 굴삭기가 왔다 갔다 하고,
천도제가 올려지는가 싶더니
해가 서산으로 향할 때까지도 사람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못내 궁금했겠지요.
“함 가 봐라.”
냅다 달려간 아이들은 떡을 얻어 먹고
또, 어떤 이의 죽음인지 속속들이 얻어 듣고 왔습니다.
“지금 밥할 건데, 이것 좀 개줄 수 있어?”
저녁에는 아이들이 걷어온 빨래를 갰지요.
“종훈아, 내가 가르쳐주께.”
형아가 가르쳐줘가며 참하게 다 개놓았습니다.
이 아이들과 올 한 해도 참말 재미날 것 같습니다.
아이들 삶이 사람살이로부터 외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지요.
그것이 죽음의 의식이든 태어남의 환희든 나날의 일상이든.
살아가는 이야기와 살아가는 움직임 속으로 아이들도 같이 뒹구는,
삶터와 배움터가 하나인 ‘산골공동체배움터’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sort
1196 2022 여름 청계 여는 날, 2022. 7.30.흙날. 흐림 옥영경 2022-08-07 409
1195 2019.11.16.흙날. 맑음 / 오늘은 ‘내’ 눈치를 보겠다 옥영경 2020-01-08 409
1194 2023. 8.22.불날. 비 소식 있었으나 / 그대에게 옥영경 2023-08-26 408
1193 2023. 4. 1.흙날. 맑음 / 대흥사-다산초당-백련사 옥영경 2023-04-30 408
1192 4월 빈들모임(4.23~25) 갈무리글 옥영경 2021-05-14 408
1191 4월 빈들 여는 날, 2021. 4.23.쇠날. 살포시 흐린 옥영경 2021-05-14 408
1190 2022. 4. 4.달날. 맑음 / 설악산 아래·4 옥영경 2022-05-03 407
1189 2021.11.16.불날. 맑음 / 폴 오스터를 떠올리는 밤 옥영경 2021-12-23 407
1188 2021. 8.18.물날. 밤비 옥영경 2021-08-29 407
1187 2021. 6. 2.물날. 맑음 / 점봉산 1,424m 옥영경 2021-07-01 407
1186 2021. 4.12.달날. 비 / 이레 단식수행 여는 날 옥영경 2021-05-07 407
1185 2020. 2.20.나무날. 맑음 옥영경 2020-03-28 407
1184 2023.10.17.불날. 맑음 / 의료자원에 대해 생각하다 옥영경 2023-10-29 406
1183 2023. 4.11.불날. 바람과 지나는 비와 옥영경 2023-05-09 405
1182 2022. 9.14.물날. 흐림 옥영경 2022-10-01 405
1181 2022. 4.21.나무날. 흐림 옥영경 2022-06-04 405
1180 2021. 8.23.달날. 비 옥영경 2021-09-04 405
1179 2021. 1.16.흙날. 맑음 / 167계자 미리모임 옥영경 2021-02-06 405
1178 7학년 예술명상(9.22) 갈무리글 옥영경 2020-10-20 405
1177 2019.11.25.달날. 흐림 / 누구 잘못이고 누구 책임인가 옥영경 2020-01-10 405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