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2.19.달날. 맑음

조회 수 1319 추천 수 0 2007.02.22 01:09:00

2007. 2.19.달날. 맑음


“어머, 어머, 이것 좀 봐, 쥐야.”
“닭 아니고?”
“닭은 이렇게 쪼지 않아요.”
닭 모이 자루에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걸 막을 만한 그릇을 찾아와
자루 안으로 넣어 터진 곳을 메웠지요.
“어, 또 있네.”
뚤레뚤레 둘러보더니 스치로폼 조각을 끼워두데요.
“아무래도 자루를 갈아줘야겠어.”
곧 닭장을 관장하시는 젊은할아버지도 돌아오실 테고,
어른한테 미룰 만도 하건만,
아이는 학교 큰 마당을 가로질러 목공실을 가서는
자루를 찾아내 돌탑 옆에 챙겨두데요.
오후에 달걀을 꺼내러 가면서 자루를 바꾸었는데,
“아이구, 아까워서 어째...”
쥐가 갉아먹다 쏟은 듯 보이는 것들을
손바닥으로 싹싹 긁어 자루에 담는 겁니다.
꼭 어떤 범주의 일을 맡은 이에게만 미룰 게 아니지요.
‘할 수 있는 이가 마음을 내어서’,
얼마나 중요한 자세인가요, 특히 공동체에서.
공동체 안에서 잘 자라는 아이가 고맙고,
공동체가 고마웠습니다.

유기농으로 포도농사를 지어 한살림에 보내는
농민 시인 박운식샘을 만나고 왔습니다.
점심도 잘 얻어먹고
같이 간 분이랑 둘러앉아 곡주도 채웠지요.
농사며 문학판 사람들 이야기를 재미나게 듣다가
혼자 오후 내내 학교를 지키고 있는 아이가 마음 쓰여
해지기 전 서둘러 먼저 일어났네요.
샘의 처녀시집 <연가>를 챙겨주셨습니다.
삶의 길눈을 밝혀줄 또 한 분의 어르신을 만나 든든하였지요.

눈을 머금고 있다 녹은 마당이 퍽이나 질척이는데,
마당을 가로질러 작은 모랫길을 만들며
아이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내내 이걸 한 거야?”
“보건소도 가고...”
“가서 뭐했어?”
“도란 도란 얘기도 나누고...
그러다 생각나서 세배한다 했더니
세뱃돈 줄 거 없다고 안 받는다셨다나요.
괜히 번거롭다 그러셨겠지요.
“그래서 내가 세뱃돈 받을려고 하는 게 아니라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하는 거라고...”
아이 편에 늘 동네 소식을 듣습니다.
"저기 윤해중 할아버지 있잖아..."
대해리의 ‘썬데이서울’이지요.

--------------

아버지의 논


얘야 여시골 논다랑이 묵히지 마라
니 어미하고 긴긴 해 허기를 참아가며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괭이질해서 만든 논이다

바람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아픈 세월 논다랑이 집 삼아 살아왔다
서로 붙들고 울기도 많이 했었다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 묵히지 마라
둘째 다랑이 찬물받이 벼는 어떠냐
다섯째 다랑이 중간쯤 큰 돌 박혔다
부디 보습 날 조심하거라

자주자주 논밭에 가보아라
주인의 발소리 듣고 곡식들이 자라느니라
거동조차 못하시어 누워계셔도
눈 감으면 환하게 떠오르는 아버지의 논

; 박운식님의 시집 <아버지의 논>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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