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29.쇠날. 맑음

조회 수 1213 추천 수 0 2007.01.01 12:46:00

2006.12.29.쇠날. 맑음


오늘 저녁 아이가 한 말이 오랜 울림입니다.

규모로야 사람 몇 되지도 않는 공동체인데
참 많은 이들이 오고 가지요.
환상이 깨져서건 공동체가 모자라서건 생각이 달라서건
들어왔다 떠나는 이들이 있고
남아서 그들을 보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아이도 있지요.
사이가 좋았든 그렇지 못했든
난 자리는 큰 법이어서 마음 참 오래 쓸쓸합니다.
그건 온 사람의 온기로 데워지는 건 또 아닐테니까요.
“나, 결심했어요.
앞으로 다른 아이, 다른 사람한테 많이 기대지 않을 거예요.
조금만 기대서 그 사람이 떠나도 문제가 되지 않게,
많이 기대면 그 사람이 없을 때 어려울 수 있으니까,
홀로 잘 설 수 있게 열심히 할 거예요.”
오늘 아침,
새 학년도에 이 학교에 살다 전학을 가는,
그러니까 이 마을 떠나게 된 아이가 누구누구다 알려주었더니
초등 2학년 아이가 그랬습니다.
그런 감정이야 생길 수 있다지만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내는 데 적이 놀랐습니다.
상처 입고(?) 관계에서 웅크려드는 게 아니라
안타까움은 안타까움이고 자기 삶은 또 자기 삶이라는 겁니다.
담백하지요.
하지만 기특한 반면
그만 마음이 싸아 했지요, 싸아 하였습니다.
공동체에 늘 남아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그의 숙명에 마음이 짠했던 거지요.
그러나 한편, 그래, 이 녀석 잘 해내겠구나, 잘 살아가겠구나,
그런 마음도 듭디다.
아이들이 또 그런 존재지요,
흙 묻은 손을 탁탁 털고 별일 없었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고는 가던 길을 가는.
저 아이도 저러는데 어른인 나 역시 그럴 수 있겠구나,
그리고 마구 행복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아이가 너무 힘들어해서, 아이 때문에...”
자주 우리는 그렇게 말합니다.
아니요.
못 견디고 힘든 건 늘 우리 어른 자신입니다.
“아이들을 믿으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할지니...”
아이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다만 그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지켜주는 파수꾼이면 되지요.
‘호밀밭의 파수꾼’(J.D.샐린저)!


올 봄, 사택 간장집에는 아궁이를 작은 벽난로처럼 만들었더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부엌이 솔아져 불을 때기가 불편은 하였으나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지요.
그런데 조금씩 황토가 떨어져 나오고 벽돌이 흔들리고
물이라도 닿으면 흙물이 되어 흘러내리던 것을
고쳐 쓸까, 다시 만들까 고민이 많다가
며칠 전 다 걷어내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오늘 뚫려있던 저 위 연통구멍을 막았지요.
탈무드에 나오는 방을 넓게 쓰는 법의 지혜처럼
(방이 좁다는 이에게 염소를 다섯 들이라고 하던가요.
얼마 뒤 그 염소를 치웠더니 방이 운동장이 되었다지요.)
오늘 불을 때고 앉았으니 부엌이 마당처럼 넓데요.
마치 묵은 빚을 청산하듯
2006학년도를 떠나보내는 상징이었던 듯했답니다.
오는 해가 이리 반갑습니다.
끝나는데 시간이 걸렸던 작년의 일들이 이 해까지 넘어와
참 징하기도 했던 올해였나 봅니다.

가만히 발음하면 입에 단물이 고이는 “새, 해!”
그대에게도 새해가 희망덩어리소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1136 2007. 2. 2.쇠날. 맑음 옥영경 2007-02-08 1147
1135 2007. 2. 1.나무날. 맑음 옥영경 2007-02-08 1149
1134 2007. 1.31.물날. 맑음 옥영경 2007-02-08 1081
1133 습관이란 너무나 무서운 것이어서... 옥영경 2007-02-08 1103
1132 2007. 1.30.불날. 거친 저녁 바람 / 왜냐하면... 옥영경 2007-02-03 1159
1131 2007. 1.29.달날. 맑음 옥영경 2007-02-03 1170
1130 117 계자 닫는 날, 2008. 1. 27.흙날. 눈발 옥영경 2007-02-03 1364
1129 117 계자 닷샛날, 2007. 1.26.나무날. 흐리다 눈 / 노박산 옥영경 2007-02-03 1227
1128 117 계자 나흗날, 2007. 1.25.나무날. 맑음 옥영경 2007-01-30 1363
1127 117 계자 사흗날, 2007. 1.24.물날. 맑음 2007-01-27 1283
1126 117 계자 이튿날, 2007. 1.23.불날. 맑기가 시원찮은 옥영경 2007-01-25 1308
1125 117 계자 여는 날, 2007. 1.22.달날. 흐리더니 맑아지다 옥영경 2007-01-24 1396
1124 2007. 1.21.해날. 맑음 / 117 계자 미리모임 옥영경 2007-01-23 1406
1123 2007. 1.19-21.쇠-해날. 청아한 하늘 / 너름새 겨울 전수 옥영경 2007-01-22 1421
1122 2007. 1.16-18.불-나무날. 맑았던 날들 옥영경 2007-01-20 1303
1121 2007. 1.15.달날. 맑음 옥영경 2007-01-19 1149
1120 2007. 1.14.해날. 맑음 옥영경 2007-01-19 1171
1119 2007. 1.13.흙날. 맑았다데요. 옥영경 2007-01-19 1097
1118 116 계자 닫는날, 2007. 1.12.쇠날. 흐려지는 저녁 옥영경 2007-01-16 1234
1117 116 계자 닷샛날, 2007. 1.11.나무날 / 바우산 옥영경 2007-01-16 1761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