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계자 닷샛날, 2007. 1.26.나무날. 흐리다 눈


< 노박산 >


“산이 깊으니 그 만큼 얽힌 얘기도 많겠지요.”
“하나만! 하나만! 딱 하나만 해주세요!”
코앞에 앉은 성욱이가 들썩들썩 일어나며 조릅니다.
어른들은 새벽부터 김밥을 쌌고,
아이들도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나 ‘해건지기’하고 밥 먹고
산에 오를 준비들을 단단히 하고 모두방에 모였지요.

“이바구 때바구 강때바구,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조선을 거슬러 고려를 거슬러 발해와 통일신라를 거슬러
삼국시대 어느 만큼이었을 라나...”
가혹한 세금을 견디다 못해
산에 들어 밭을 일구고 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여 어디쯤에 그런 화전민이 살고 있었겠지요.
그 가운데 참으로 따스한 한 부부가 있었는데
천지에 일가도 없는 그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예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개똥이라는 탐스럽고 앙팡진 아들도 낳고.
지금 같은 이런 겨울이면
얼어붙은 산에서 먹이를 구하지 못한 산짐승들이
마을로 내려오고는 하였는데
더러 사람이 사라지는 일이 있기도 하였지요.
몹시도 추웠던 어느 날 밤,
아주 이른 새벽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불을 더 지피러 나간 아비가
어째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마을 사내들 모여앉아 짚신과 망태기를 삼는 사랑방에라도 갔을까 하였으나
해가 중천에 뜬 뒤에도 돌아오질 않았지요.
“개똥이 엄마, 개똥이 엄마!”
동네 저 끝자락, 젤 높은 곳에 사는 덕구 아비가
짐승에 뜯긴 개똥이 아범을 데려왔는데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그 목숨 거두어졌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고 개똥이마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지요.
세상에 기댈 데라고는 자식새끼 하나인데,
남편을 잃고 아무 기운이 없던 에미는 몸을 추스르고
저기, 지금은 면소재지 상촌 임산 장에까지
고개 열둘을 넘어가서 갖은 약을 구해보기도 하였으나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꿈에 나타난 남편이 이르길,
아이의 왼쪽 허리께 작은 점이 있는데
잘 보면 그것이 구멍이며 병이 들고 나는 자리라 하였지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들은
저들 등 어디께도 그런 점이 혹 있을 세라
더듬더듬 만져보며 야단이었습니다.
“없다!”
“휴우!”
잠시 뜸이 들여진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검은산에 가면...”
검은산이라면 눈 내린 겨울에도 시커먼 바위산이 드러나
사시사철 색이 변하지 않는 높은 산으로
사람들이 갈 일도 없는 산인데
남편이 일러준 대로 약을 찾아 떠나노니...
몇 날을 돌아오지 않는 애어미를 찾아 온 동네 장정들이 검은산을 향하고
그 아래 깎아내린 비탈 구덩이에서 개똥이엄마를 발견하게 되는데
언 그 엄마 한 손에 노박덩굴열매가 꼭 쥐어져 있었다지요.
“그 열매 껍질을 갈아 개똥이 점, 그러니까 구멍을 메꾸었더니...”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개똥이는 산골 사람들의 사랑으로 잘 자라
세상에 평화를 나누며 가난하고 여린 이들을 위해 살았다 합니다.
여우골이었던 이 골짝이
큰 불이 난 뒤 큰바다(대해리)란 이름을 얻었듯
그때부터 검은산도 달리 불리게 되었는데...
“아이 이름을 따서 개똥산이라 불렀을까,
그 열매이름을 따서 노박산이라 불렀을까?”
“노박산요!”
아니, 어찌들 알았단 말인가요.

“골이 깊어 호랑이가 나온다고 하고...”
멸종된 것들의 이름이라 하더라도
세상 일이 우리가 아는 영역 안에 꼭 있는 것은 아니니,
이 동네 조중조 할아버지가 호랑이 새끼를 잡았다는 자루를 보았던 류옥하다의 증언은
점점 아이들의 상상력을 증폭시키고
차츰 두려움도 배가시킵니다.
“진짜 나오면 어떡해요?”
아이들이 걱정스레 되묻자 기륜이가 외쳤습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차리면 된대.”
“그러게, 그러게, 그러면 되겠네. 호랑이한테 물린다. 그러면?”
“정신을 바짝 차려요!”
멧돼지를 만나면 어쩔까, 늑대를 만나면?
“곰을 만나면요?”
모두 납작 엎드려 죽은 척 연습도 해보았지요.
민주지산으로 겨울 훈련을 떠나 돌아오지 못한,
수년 전의 군인들의 사고도 각오를 다지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니 안내자의 말에 귀를 잘 기울여야만 합니다.”
당장 마당에서 모이는 게 다르던 걸요.
아이 서른과 어른 열이 그렇게 마을을 떠났습니다.
“젊은 할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불과 가마솥방을 지키는 어른들만 남고 모두가 나섰지요.

흐리다 눈비 내린다 하였습니다.
오늘은 또 어떤 길이 될지요.
전설의 검은산, 그러니까 노박산을 향해 갑니다.
아직 있기는 할까요?
거기까지 길은 다 사라졌을 텐데
우리가 닿을 수는 있을까요?

학교 뒤란 오솔길을 내려 뒷마을 댓마를 지나
논을 돌고 밭을 지나니 산 들머리가 금새입니다.
“안녕하세요?”
석화아저씨네 아줌마가 나무를 해서 내려옵니다.
“그래, 어데들 가?”
“산요.”
“운동하면 좋제.”
애들도 줄줄이 인사를 드립니다.

“어, 다리...”
외나무다리가 있었더랬습니다.
우리가 저 골짝으로 건널 것은 아니나
이쪽으로 저쪽으로 건너는 재미를 주던,
꼭 한 번은 쉬었다 가는 다리였는데,
기름값이 오르며 늘어난 나무보일러는
나무를 자꾸 내려오게 하더니
커다랗기도 했던, 쓰러져있던 낙엽송도
그렇게 땔감으로 잘린 모양입니다.

산 너머 궁촌마을이 뵈는 마루입니다.
옛적 이 길로 두 마을이 오고 갔다 했지요.
마지막 오름이 워낙에 가팔라
모다 헉헉거리며 거미처럼 기어 올라오고 있습니다.
“한 고개만 넘어요.”
성욱이가 당장 쫑알거리며 숨을 몰아쉬었지요.
모두가 모이고 다리쉼을 하며
파이 하나로 에너지를 넣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인 게지요.
“이거 봐요!”
파브르 순규는 그 사이에도
솔방울에 든 애벌레를 발견하여 보여줍니다.
자주 우면산에 오른다는 그이지요.
“산은 산에 사는 것들의 집이므로...”
산을 찾아든 우리가 어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읊고,
서로를 어찌 부를지 연습도 하였습니다.
“어이!”
“어이!”

오늘은 거의 능산만을 타보려 합니다.
대해리에서 올려다보면 동쪽으로 길게 뻗어
어두워오는 저녁 하늘 아래
허리를 둘러치는 실루엣을 만드는 선을 따라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짧고 쉬운 길이 될 것입니다만
또 어떤 변수가 기다릴지야 모를 일이지요.
사람 발길 끊긴지 오래인 길은
낙엽과 흙으로 카펫길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샘들 말대로 무릎에도 무리가 덜할 길이겠습니다.
죽은 자의 집은 곳곳에서 산자들에게 좋은 쉼터가 되어주지요.
오르내리며 곳곳에 있는 무덤 곁에서 그리 쉬었다 갑니다.

네 번째 고개가 가장 가파를 거라던 대로
힘겹게 오르고 있는데,
아직 눈이 드문드문 남은 비탈길에
보석가루처럼 빛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노박열매!”
마치 누워있던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약재를 구한 에미처럼
감격에 겨웠습니다.
“어디요, 어디?”
알려줄 것도 없이 아이들은 벌써 열매를 줍고 있었지요.
하얀 눈 위에 붉은 열매가
세 갈래로 꽃잎처럼 갈라진 껍질 위에 꽃마냥 피어있는 것을
어떻게 찾지 못할 수가 있으려나요.
경사가 심한 곳이나 아이들은 땅에 달라붙어 일어설 줄을 몰랐습니다.
나무를 버팀목으로 기대고 주저앉았지요.
아이들은 아슬아슬하게 열매를 계속 모읍니다.
“노박열매다!”
“전설의 열매다!”
아이들이 허리를 펴며 간간이 외치자
뒤에 오던 아이들도 걸음이 빨라졌지요.
“우리도 길 잃으면 어떻게 해요?”
병완이가 걱정이 많아졌습니다.
전설의 개똥이 어미를 생각한 거지요.

다섯 고개를 넘습니다.
노박산에 이르는 마지막 고개입니다.
저 깔끄막을 굳이 넘기보다
아이들과 낙엽미끄럼을 타고 정상에서 내리는 능선에 닿아도 좋을 듯합니다.
오른쪽으로 틀어보았지요.
주르륵 주르륵, 야단, 야단입니다.
“으악, 내 고추!”
사내아이들의 익살로 미끄럼의 재미가 더했지요.
내려서서 다시 능선 쪽으로 오르자니
길은 짧으나 쉽지는 않은데
큰 아이들이고 작은 아이들이고 서로를 챙기고 있었습니다.
지인이는 또 지우를 어찌나 잘 챙기고 가던지요.
이제 또 한참을 능선을 타겠지 하고
안도감으로 아이들은 어떠한가 뒤를 돌아봅니다.
“아...”
거기!
우리가 다시 찾아 선 능선에서 올려다보자니
왼쪽으로 아이들이 낙엽 미끄럼틀을 타며 내려오고
능선을 넘어 이편으로
시커먼 바위들이 검은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검은산...’
말을 잃었지요.
그렇게 만나게 될 줄 몰랐습니다.
물꼬가 하는 일마다에 닿는 사람 너머의 손길을, 기적을
또 그렇게 만났더이다.
“검은산이다!”
준영이며 명한이며 태현이며들이
뒤에 오는 아이들을 향해 외쳤지요.
그런데 마지막에 오던 아이들은 앞을 따르기 바빠
그 산을 보지 못하였다 하데요.
안타깝게도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게지요.
날만 그토록 흐리지 않았어도
모두를 기다렸다 올 수 있었을 걸...

아래로 뻗친 능선길을 내려오다
웬만큼 평지를 이루는 곳에서 도시락을 풉니다.
다른 때만큼 김밥이 줄지 않았지요.
산행이 수월해서이기도 하고
밥이 좀 얼어서도 그렇겠습니다,
누구는 설익어서라고도 했지만.
그래도 능선이 시작되던 지점에서,
또 노박덩굴 아래서 단음식들을 잘 챙겨먹었던 터라
허기를 걱정할 건 아닙니다.
아무렴 시장이 반찬인 법이지요,
배고프면 달라하지 않겠는지요.
“검은산을 뒤로 하고 서북쪽으로 난 능선을 타기 시작하면
서쪽으로 마치 그림처럼 세 단계의 산이 겹쳐져 구름처럼 나타나노니...”
노박산 전설의 한 부분을 읊으며 나침반을 꺼내들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이제 그 능선을 타고 가면 산 아래 마을과 닿는다 했지요.
“노박산에 이르는 길이 다섯 고개,
그곳에서 마을로 이르는 길이 네 고개라 하였습니다.”
아무렴 다섯 고개를 되돌아가는 것보다야
네 고개를 넘는 게 낫다마다요.

수월한 능선길에서 내려설 때쯤이 되었지요.
이왕이면 또 한번 낙엽미끄럼틀을 타도 좋겠습니다.
어데쯤이 좋을까,
가시덤불을 피해, 떨기나무류가 적은 쪽으로,
바위도 없으면 더 좋겠지...
마침 가파르기는 심하나 쉬 다치지는 않겠는 비탈에서
앞장서서 굴러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어, 어, 어...”
소리 소리 지르며도 신이 난 아이들이었지요.
“여기가 그 엄마가 미끄러진 덴가 봐.”
준영이가 아래까지 굴러 내려와 낙엽구덩이에서 일어서며 그랬지요.
남자 애들은 아예 엎어져 슬라이딩 자세로
다 내려와서도 더 더 내려갑니다.
“점심을 먹고 출발한 직후, 가파른 비탈길에서 아이들이 한 번 굴렀다. 크게 다칠 뻔한 경우였지만 다행히 그 길에는 돌이 없어 크게 다친 아이는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 너무 섬뜻했다.”
근영샘이 나중에 그리 썼습니다만
낙엽길이어서 애써 몸을 뻗대지 않고 잘 구르기만 하면
외려 재미가 넘치는 곳이었지요.
다만 아래에서 아이들이 엉켜 제 때 빼주지 않으면
부딪혀 사고가 날 수도 있었는데
샘들이 빠르게 움직여주었답니다.

“눈이다!”
“눈이에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바빠졌지요.
아직도 두어 시간을 더 잡고 있는 산행입니다.
물론 질러가는 길이 없지는 않으나
오랜 걸음만큼 아이들의 마음에 쌓이는 것 또한 큰 것을 알기에
아주 커다란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 걸음은 눈싸라기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꼬리의 몇몇이 미그럼틀에 오른 걸 확인한 뒤
기다렸던 모두는 다시 길을 잡아 떠났지요.
잠깐 지나는 눈비가 아닙니다.
금새 눈이 되고 함박눈의 기세가 되더니
펑펑 내리퍼붓기 시작했지요.
길도 그만큼 거칠어졌습니다.
더구나 이젠 길이 길이 아닙니다.
옛적에도 길이었던 흔적이 없던 곳이지요.
다만 물길이 만들어놓은,
이제는 말라붙은 골이 아래로 가는 길임을 알려줄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조금 내려가니 호두밭입니다.
오래전 호두를 키워 내던 곳이나
이제 덤불로 우거져 사람 손 닿은 지 한참이 된 곳이었지요.
버려두고 도시로 떠났겠습니다.
지목(地目)은 밭이나 산이 돼버린 게 20년도 30년도 더 되었을 겝니다.
모두 덤불 사이 계단식 밭을 빠져나오느라 애들을 먹겠습니다.
“구덩이, 구덩이!”
“나뭇가지! 나뭇가지!”
뒤편에서는 현빈이가 안내를 잘 해주었다했지요.

마을이 멀지 않으니 위험할 것은 없으나
아이들이 온통 긁히겠구나,
그래도 눈길에 이 길이 다른 어떤 길보다는 안전할 것입니다.
“어이!”
“어이!”
눈 때문에도 덤불 때문에도 서로가 뵈지 않아
소리로 서로의 안전을 확인합니다.
선두에 선 제 뒤로 열 넷의 아이가 바짝 따라 붙고 있었지요.
그렇게 샘들을 중심으로 덩어리 덩어리를 이루며 오고 있을 테지요.
“아악!”
다리가 접질렸습니다.
무릎이 성치 않은 육십 노구(관절 나이)가
길 아닌 길을 뚫고 나오는 산길이 수월치 않았던 게지요.
그예 미끄러지며 무릎을 접질리고 만 것입니다.
5분여는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앞에 아이들은 앞쪽으로 정찰병이 되어 다녀오고
준영이가 뒤에 오는 패들이 길을 잃을까 좇아올라갔습니다.
눈은 바로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만치 내리붓고 있었지요.
“어이!”
“어이!”
“옥샘이 다쳤다!”
그런데 위에서도 다급한 소리가 건너옵니다.
“누가 다쳤어요, 피나요!”
아이들한테 일어난 사고는
앉을 수조차 없는 교사도 벌떡 일어나게 하지요.
띄엄띄엄 줄을 선 아이들 사이로
아래고 위고 뭔가 다급한 상황이 일어났다고 전갈들이 오고가는 속에
이쪽 상황을 위해 급히 형길샘이 날다시피 뛰어내려왔습니다.
아직 바이러스장염이 다 지나가지 않은 형길샘은
혼잣몸 가누기도 싶지 않을 텐데
가운데서 내내 앞뒤를 잘 연결하고 있었지요.
“나는 괜찮아, 그런데 어찌 된 거야? 누구야?”
우선 여기를 어떻게든 빠져나가자 합니다,
아이들을 추슬러 이 덤불을 헤쳐나간 다음 보자고.
형길샘을 원래 위치로 올려 보냈지요.

몇 걸음을 더 나아가자
갑자기 앞이 확 트였습니다.
어느 오월 숲 탐험을 떠났던 우리들에게 무릉도원처럼 펼쳐졌던,
갑자기 너른 평원으로,
그리고 그 둘레에 굵기도 굵었던 빠알간 딸기들을 주렁주렁 달았던,
절대 이 세상의 한 풍경일수가 없었던 그 딸기나라가
역시 산에서 너른 들판처럼 펼쳐졌으니
우리 생애 몇 되지 않는 진풍경으로 입이 벌어졌지요.
눈은 더욱 굵어졌으나 물기 또한 많이 머금어 툭툭 떨어졌습니다.
모자를 다 잘 챙긴 것도 큰 도움이었지요.
상원이가 소리 내어 울며 합류합니다.
누가 다쳤다하고 눈이 거세어지니 무서웠던 게지요.
“걱정마,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모두를 구출해서 나갈 거야.”
앞이 멈추고 뒤에 온 모든 이들까지 더하며
상황 점검이 있었습니다.
눈이 온 몸을 스며들고 있었지요.

성욱이었습니다, 다쳤다는 아이.
아따, 고놈 까불락대기도 하더니만
뛰다 바윗돌에 그대로 머리가 박혔던 겁니다.
앞서오는 다희를 굳이 밀치고 앞으로 나아가다 그랬다지요.
“그러게, 뛰지 말랬잖아.”
다희도 핀잔을 주었다가
부딪힌 그 상황에서 꼼짝도 않는 성욱이 앞에
다른 말을 더할 수가 없었다지요.
아이들을 돌려세워놓고 성욱이 상황을 봅니다.
형길샘이 수건을 두르고 현애샘이 모자를 씌워놓았습디다.
“내가 이걸 수년 들고 다녔어도 쓸 일이 없더니만
드디어 써보네.”
구급약으로 처방을 하며 유쾌한 목소리를 내지만
사실은 상황이 더 어렵습니다.
이마며 머리 세 군데가 찢어졌습니다.
“이렇게 부딪혀 머리 안으로 피가 고이면 더 큰 일이라는데,
피를 흘려 다행이다.
부모님께 꼭 고맙다 전해라,
선하게 잘 사셔서 하늘이 도와 이 정도만 다쳤다고.
너도 귀하게 살아난 몸이니 꼭 좋은 일에 너를 쓰며 살도록 해라.”
안되겠습니다.
맨 뒤에 오는 상범샘이 닿자마자
성욱이를 붙여 조용히 먼저 내려 보냅니다.
“우리는 1시간쯤 산을 더 탈게.”
마침 여기는 저 내 건너로 좋은 길이 나 있는 곳이거든요.
(다른 아이들도 알았다면 당장 덩달아 내려가려 했겠지요).
아무래도 큰 병원이 낫겠지요.
20여분이면 닿는 면소재지에도 병원은 있으나
연계가 더 잘 되어있는 김천의 큰 병원으로 보냅니다.
한 해 몇 차례는 가는 응급실이지요.
아주 큰 상처가 아니어도 꿰매주는 게 빨리 낫게 한다는데
저희 역시 동의합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꿰매주고 있지요.
(상범샘은 그 길을 어지럽다는 성욱이를 업고 갔답니다.
두 사람이 그토록 빨리 병원으로 갈 수 있었던 게 궁금했던 아이들에게는
물꼬 전용 헬기를 타고 갔노라 했지요.)

샘들은 불러 모읍니다.
마을은 바로 아래지요.
“1시간만 더 탑시다.”
성욱이의 상황을 설명한 뒤 남은 우리들의 움직임을 전하는데
그래도 우리 샘들, 아무소리 안하고
이 상황에서 왜 굳이 길을 더 어렵게 가느냐 묻지 않습니다.
모두 물꼬에서 아이들과 오르는 산오름의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어려운 길마다 함께 했던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아이들이 한 순간 얼마나 성장하는지를 보았던 그들이지요.
처음 온 이조차 이 분위기를 따라주고 있었습니다.

저수지로 향해가는 조금 더 나은 길도 접고,
성욱이가 내려간 길은 아예 없는 길이니 하고,
비탈을 다시 기어오릅니다.
현빈이는 새끼일꾼 지윤이 손을 움켜잡다가
힘든 지윤이가 지혜롭게 낸 의견에 따라
나무마다 ‘나무야 사랑해’하고 껴안으며 오르고 있었지요.
눈이 더 굵어집니다.
양도 그만큼 많아집니다.
굳이 기어오르고 내리고 하지 않아도
나 있는 작은 길을 따라 걸어도 그만큼의 효과가 있겠는 눈 속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발길이 닿았음직한 곳으로 길을 잡고
겨우 한 발 한 발 디디며 갈 수 있는 길을 따라
산허리를 돌아갔지요.
굽이굽이 돌며 이제는 산짐승만 다니겠구나 싶은 길을,
그림에 그어져있는 듯한 그 선을 따라갑니다.
“눈꽃나무도 있고 눈이 너무 예뻐서...”
새끼일꾼 혜진이가 나중에 그랬지요.
“산 중턱을 빙 둘러가며 걸어가는 일행들의 풍경이, 꼭, 동화 속으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아, 그 옛날 그림을 통해 무릉도원으로 갔다던 전우치가 떠올랐다.”
형길샘은 돌아와서 그리 썼더랬습니다.
이심전심이지요.
황금들보로 배고픈 이들의 곡식을 장만했던 전우치,
왕 앞에 붙잡혀나가 그린 그림의 말을 타고 도망간 그가
그림 속의 미녀들을 불러 술상을 차렸더라던가요,
전우치전의 끝을 형길샘과 달리 기억합니다만
어이했던 그림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경험을 너도나도 하고 있었지요.
“대나무 아파트 같애요.”
조릿대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길 앞에서 한 어느 아이의 표현은
그 뒤를 걷던 재현샘도 고개 끄덕이게 하더라지요.
우리는 가끔 걸음을 멈추고 휘 둘러보고 뒤도 돌아보았습니다.
눈이 나리고, 날리는 눈에 눈을 인 나무들이 어리고,...
언제 이런 시간 이런 풍경을 또 만날 수 있을는지요.

눈 내린 산길,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감직한 오솔길,
그 길은 모든 소리를 먹고
수런거리던 아이들의 말조차 먹어버렸습니다.
다만 눈만 내렸지요.
“정말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 산중에서 내리기 시작하는 눈을 본 것, 눈을 기다리던 아이들에게도 선물이었고 이 이쁜 아이들의 즐거움과 기쁨도 내게 선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그들의 즐거움이 나에게도 즐거움이 된 날.
오늘은 아이들의 모습이 그저 그림처럼만 생각난다.
성욱이의 부상에 놀랐지만 한편으로 뛰어다니던 아이들에게 조심할 수 있는 기회, 친구들끼리 챙기고 보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 나쁘지만은 않았다. 길을 앞서며 눈 위를 안내하던 태현이가 참 괜찮은 아이라 생각되었다.”
현애샘은 하루 갈무리글을 그리 썼습니다.

마을이 나타났지요.
눈을 이고 있는 지붕,
눈이 닿지 않은 곳이라고는 어디도 없어서 온통 눈밭인데
개 짓는 소리가 퍼뜩 마을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살아 돌아와서 기뻐요.”
서로에게 던지던 그 말이 참 진심으로 전해져서
모두들 큰 선물을 받은 산행이었다지요.
“애들이 잘아서 걱정했는데,
달골도 지치지도 않고 우르르 가고 잘 갔다 오더니,
혹 똥오줌을 지려 추운데 어려울까 걱정했는데...”
보름샘이 시름을 놓으며 그랬습니다.

그리고,
눈이불을 덮어쓴 마당에서 아이들이 뒹굴었지요,
산오름보다 더한 열정으로,
두어 시간을 넘게 어둑해질 때꺼정.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고
눈싸움 평상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그 사이 전화 곁을 지켰습니다.
김천에서 연락이 늦습니다.
드디어 벨이 울렸지요.
“아무래도 부모한테 연락을 하는 게 좋겠다고 하는데,
꿰매는 게 그냥 꿰매는 거랑 성형 쪽으로 꿰매는 게 다르다고...”
사고야 이미 벌어진 건데 멀리 있는 부모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걱정만 더하지,
그리고 꿰맬려면 어떤 상처든 흉터가 덜 남는 방식으로 해야지
돈이 다르다니, 그래서 선택하게 하는 짓이라니...
“당연 성형쪽이지.”
얼마나 비싼지야 모를 일이지만
분명 부모라면 그렇게 했을 거니까요.
더한 안 좋은 상황이 없이 다만 다른 데 찢어진 것처럼 꿰매면 된다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으로 그제야 씻으러 갔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머리 조아리며.

아이들은 샤워를 한 뒤 국물 좋은 국에 밥 말아먹고
산을 내려온 마음을 나누는 한데모임을 했고,
고래방에 건너가 강강술래도 하였습니다.
병원을 다녀온 성욱이도 말짱해져서 뛰고 있었지요.
청어엮기를 하는 어른들 틈을
아이들은 물고기처럼 오갔습니다.
나중에는 엉켜서 뭐가 안되겠다 싶어 내쫓았지만
그런 대동놀이가 없었지요.
“악도 그렇잖아요. 들어와서 같이 노는 게 잘 치는 거라고...”
그야말로 대동마당이었던 겁니다.
돌아와서는 모두방에서 장작놀이대신 촛불잔치가 있었습니다.
모두방으로 가는 길에 샘들이 적절하게 나눠 서서 분위기를 가라앉혔고
문 앞에서 현애샘이 마지막으로 입에다 손을 갖다 대면
안에서 상범샘이 아이들을 받았지요.
열댓 자루의 촛불이 원을 그린 둘레에 하나둘 그렇게들 앉았더랍니다.
우리들이 살아왔던 모든 날들을 돌아보듯이
지난 며칠을 돌아보았지요.
하루 갈무리야 감자싸움으로 학교가 들썩했을 밖에요.
젊은 할아버지가 아이들 아쉬울까,
뒤란 아궁이에다 잘 구워낸 감자였지요.
다른 이의 얼굴에 숯을 묻히느라
고요함 뒤 격렬한 뜀박질이 이어졌더랍니다.

샘들도 마치 이 겨울을 다 같이 보내기라도 했는 양
계자 갈무리를 오래도 합니다.
“새끼일꾼은 정말 물꼬의 매력입니다.”
현애샘이 그랬지요.
새끼일꾼,
어린날의 물꼬의 경험을 안고
어른들을 도와 이곳에 손발을 보태는 중고생 자원봉사자를 말하지요.
물꼬의 자랑입니다.
어른들과 아이들 사이에서 좋은 다리가 되고
그리고 아이들의 좋은 안내자로,
때로는 울타리가 되기도 하는 그들입니다.
무엇보다 큰 도움꾼이지요.
이곳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웬만한 자원봉사자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모자라지 않답니다.
지내는 동안 어른들과 꼭 같이 움직이니 결코 쉬울 수 없는 자리인데도
이듬해에 또 찾아오는 그들이랍니다.
현애샘은 영환이가 새끼일꾼으로 오는 내년에
같이 오겠다 한 약속을 떠올리며 흐뭇해라 하고 있지요.
“산에서 기륜이가, 저요 건빵 안먹었어요, 하며
아침에 받은 건빵 3개를 자랑하는 거예요.”
형길샘입니다.
곶감집에서 자고 오르내린다고
아침마다 주는 건빵 3개지요.
“물꼬에선 그런 게 잘 쓰입니다.
잘 쓰일 수밖에 없는 곳이구요.
크게 번지르르한 게 아니라...”
이들과 앉았으면 정말 여기 살면서 저도 잘 모르고 지나가는 것들을
그들을 통해 읽고 다시 깨우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물꼬가 그렇지요,
작은 것들의 가치가 빛나는 곳,
그런 게 힘인 곳이다마다요.

모다 고맙습니다,
이 눈 천지가, 이 어른들이, 이 아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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