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는 분 걸음이 쉽지 않겠다.

아침 8시에도 비는 계속되고 있었다.

퍽 많은 비가 어제 종일, 그리고 간밤에도 내렸다.

비 소식에 상황을 엿보자 싶더니 결국 내리고 있네요...’

문자를 넣었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오전에 비가 더 내리겠다는 예보가 있었다.

이제 그친 것 같아 출발합니다~’

벽이고 바닥이고 물이 좀 빠져야 하니

정오에 와서 낮밥을 먹고 시작하자고 기별 넣었는데, 일단 출발했노라셨다.

벽화를 그리자고 받아놓은 날이다.

 

학교에서 겹사다리며 비닐이며 페인트통이며 두루 챙겼다.

달골 창고동 북쪽 벽면(대문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면)과 동쪽 벽에는

수 년 전 충남대 사대생들이 들어와 그려둔 벽화가 있었고,

두어 해 전 건물 외벽 도색을 하면서 묻혔다.

다시 그릴 짬을 보던 참에 인근 면소재지 화가이자 작가인 남석샘이

지난 4월의 물꼬 찻자리에 다녀가며 손을 보태시겠다 했다.

그 뒤로 답방마냥 샘의 작업실에서 다시 이야기가 이어졌고,

오늘이 날이 되었던.

황간역 마당에 항아리들을 모아 그림을 그렸던 여러 해 전의 한 잔치에서

같이 작업했던 인연이었다.

 

꽃무데기 그려 넣고 싶었다.

벚꽃이며 몇 가지 입에 올랐다가 들꽃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쑥부쟁이로 최종안을 잡았다.

마침 들고 있던 그림책 하나에서 표지에 있는 아이가 보였네.

살짝 옷을 좀 다르게 입혀 그려 넣고,

쑥부쟁이를 그렸다.

척척척척 얼마나 손이 익으시던지.

대도시에서 밧줄사다리 위 고공에서

밥벌이로 하던 광고쟁이 시절이 남긴 흔적이셨네.

해가 날 듯 말 듯도 하다가 가끔 비가 흩뿌리기도 하였으나

대세에 지장은 없었다.

 

처마 끝에 글도 하나 새겨 넣으시지요?”

그럴까?

처음엔 건물 제목이나 달골 지명을 넣자고 하다가

그보다는 대학본관 건물이라도 되는 양 물꼬가 지향하는 어떤 글귀면 좋을 테지 싶더라.

한글로 한자로 영어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라틴어로 생각이 모아졌다.

흔한 언어가 아니니 사람들이 꼭 쳐다보고 읽어보고 물어보지 않겠는지.

‘De mea vita’(나의 인생에 대하여)

‘Dum vivimus, speramus.'(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희망한다.)

‘Dum spiro, spero.'(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

‘Dilige et fac quod vis.'(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아무래도 무겁다.

‘beatitudo'(행복)?

그러다가 남은 어절은

‘tira mi su’(끌어올리다, 나를, 위로; 나를 위로 끌어올리다=기운을 내다=힘을 내다)

흐린 날이라 저녁 7시에만도 어둑해졌다.

아이(i)자 두 개에 점을 찍고 남석샘이 사다리를 내려섰다.

같이 붓을 들자 하고 작업복을 입고 나섰으나

겨우 훈수만 두었다.

애 같지가 않아요...”

남석샘이 고민하면,

, 괜찮아요. 화장하는 거 하고 같아요.

감은 눈을 꼬리를 흘리지 말고 여기를 뚝 끊어서... ”

말만 하면 되었네.

아이 인상에 조금 손 보태고 눈매를 고치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쑤셨으나

(혼자 생각에) 온전하게 당신 작품으로 남기기로 하였다.

특히 쑥부쟁이 그림에서는 얼마나 오래 해오던 일이신지 거침없는 붓질이었고,

속도감에도 아주 놀랐더랬네.

명화다, 명화!

 

그림을 그리시는 앞에서

어디 공원 공사 현장에서 패 내온, 남은 맥문동 두 자루를 마저 끌어와 다듬었다.

아침뜨락 옴()()3(!) 부분 남아있던 곳에 마저 심고 나왔고,

나머지는 기숙사(햇발동과 창고동) 뒤란 축대에 한 줄 심으려 한다.

백여 포기 들어가겠다.

풀을 뽑았고, 심는 건 내일로.

 

달골 대문 위에도 다루촉(혹은 룽따)을 걸자 하고 시간만 지났더니

잊지 않으면 하는 날이 오는 일들처럼 이 또한 그러하다.

마을 들머리 커다란 느티나무만큼이나 큰 호두나무와

반대편으로는 역시 오래된, 산 쪽 낙엽송에 이어 걸었다.

다시 거꾸로 한 줄 더!

짙어진 잎새들 덕에도 그렇겠지만 다루촉 두어 줄에도

벌써 전체 분위기를 명상센터로 만들어주더라니.

 

멧골다운 저녁밥상이었다.

두릅무침과 시금치나물 콩나물무침 호박고지나물, 막 잘라온 부추로 부친 전,

손님 왔다고 낸 고기볶음, 누가 낚시했다며 전해줘 얼렸던 갈치에 무 깔아 조림하고,

김칫국도 올렸다. 그리고 막걸리와 두부김치.

비는 완전히 멎었고, 산골 밤도 깊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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