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7.달날. 맑음

조회 수 380 추천 수 0 2022.01.11 02:17:54


 

허전하시겠어요!”

아이들이 다녀가고 나면 휑하지 않냐고들 묻는다.

그럴까?

여름이면 가는 손님의 뒤꼭지가 고맙다고들 하지.

땀으로 범벅진 여름만 그러한가,

가서 아쉽지만 또한 보내는 이의 시원함도 있겠지.

아이들이 있으면 있어서 쏟아지는 웃음이 있고,

가면 간대로 또 멧골 고즈넉함이 주는 평화와 평안이 있다.

뭐 멧골살이가, 물꼬살이가 안 좋은 날이 없다는 말? 그쯤.

 

약발 떨어질 때가 돼서...”

물꼬에 아이들을 보내며 부모님들이 더러 그러신다.

다녀가면 한동안 물꼬에서 지내는 동안 늘 읊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을 외치며

척척 제 앞가림도 잘하고 청소며 상차림이며 집안일도 제법 한다지.

시간이 흐르고, 차츰 그 행동도 사그라드는 촛불처럼 옅어지다

어느 날 돌아보면 멈춰있다고.

물꼬에 아이들이 다녀가면 이곳 또한 그런 게 있다.

늘어지는 고무줄 같은.

그러다 얼른 정신을 차리지.

사는 일이 늘 힘을 내야 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는.

그러면 수행에도 더 힘이 붙고, 더 촘촘하게 하루를 산다.

내 여기서 잘 살아 그대들에게 힘이 되겠네, 뭐 그런? 그쯤.

그것은 또한 다시 올 아이들을 맞을 준비이기도 한.

어느 하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

아이들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진짜와 거짓을 구분하니까.

내 온몸에 수행이 붙어 아이들을 안내할 수 있기를 바라니까.

그래야 내 말이 아이들에게 들릴 수 있을(먹힐 수 있을?).

청계를 마치고 나니 아직 얼어붙은 동토 같은 이곳이나

가뿐하게 휘젓고 다닌다.

 

학교아저씨는 코로나19 백신 3차 접종을 하러 읍내를 나가셨다.

햇발동에 아이들이 남긴 수건을 빨고,

면소재지 나가 농협에 보내야 할 서류를 챙기고 있을 때

준한샘이 들어왔다.

달골 대문께 커다란 호두나무 가지가 위태로웠다.

내가 아는 세월만도 40년은 된 나무이니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나무.

언젠가 태풍에 툭 떨어져 이웃의 농막 지붕을 치기도 했다.

인철샘이 여기서 요양하던 시기

암벽등반용 클라이밍 하네스를 써서 가지를 자른 적도 있었지.

나무는 또 자랐고, 죽은 가지도 늘어났다.

언제부터 그걸 좀 잘라야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준한샘이 서너 차례 시도를 했다.

살피고 궁리하고 머리를 맞대고 며칠 전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엿보았다.

트럭을 아래 세워두고 그 위로 사다리를 놓는 것도 고려해보았지만

(여러 해 전 학교 교문의 현판을 새로 만들 적 그 무거운 나무 받침을 올리던 때처럼)

어림없다.

사다리차라도 불러야 해결이 될 것인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시간만 흐르다가,

우린 오늘 오후 그예 해보기로.

썩어 있던 굵은 줄기는 아래쪽에 걸릴 게 없으니 위에서 그냥 툭 잘라 내리고,

한 가지를 톱질을 살짝 해두고 밧줄을 묶고 그 밧줄을 본 줄기에 둘러맨 뒤

아래서 나무 쪽을 향해 당겼다. 성공!

그 경험이 있으니 내친 김에 다른 가지도 그리하기로.

하여 세 가지가 세 차례 같은 방식으로 해결이 되었다.

너무 짱뚱하게 잘라 거의 줄기만 남아

저러다 영영 죽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내 걱정을 읽었는가,

준한샘이 그랬다.

봄이 되면 자른 가지 쪽으로 새순이 힘차게 오를 겁니다.”

봄을 또 기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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