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9.5.불날. 흐리다 비

조회 수 1243 추천 수 0 2006.09.16 08:49:00
2006.9.5.불날. 흐리다 비


산으로 둘러친 흐린 마을을 창으로 내다보며
해건지기를 하는 아침입니다.
창고동은 그저 앉았는 것만으로 평화입니다.
내년에 바깥사람들과 명상프로그램을 꾸리는데 더없는 공간이 될 듯합니다.

배움방에서는 ‘이브 가넷’의 장편동화 하나를 읽어갑니다.
어투가 어려워 읽기에 거북하였으나
적절히 말을 바꿔가며 읽으니 1학년들도 무리 없이 듣고 있었지요.
저들 또래의 아이들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로울 지요.

주말에 물꼬생태공동체에서 포도따기잔치를 열기로 하였지요.
뭐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닙니다.
이 산과 들에서 난 것들로 차린 밥상에 앉아보고
그간 키운 무농약 포도를 한껏맘껏 따먹을 참이지요.
다음은 어슬렁어슬렁 물꼬를 둘러친 곳들을 찾아나서
자연이 준비한 선물을 받으러 떠나는 겁니다.
아이들이 이 잔치준비에서 맡은 일은
그 길을 안내할 땅그림을 만드는 일이지요.

오전엔 지도 제작을 위해 앞산 구비 도는 길과 계곡을 훑었지요.
어디 몰라서 간 건가요.
여름이 남기는 마지막 내음을 맡으러 나간 길입니다.
새터포도밭을 지나 다리를 건너자 물꼬 고구마밭과 콩밭이 나오고
이제는 감자밭에서 깨밭으로 바뀐 그 윗다랑이를 지나
눈썰매장을 오르면 마을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앞산 구비길’이 이어집니다.
“여름은 어디나 이렇다니까.”
어디라고 풀섶이 아니던가요,
산판하느라 경운기가 널럴하게 다니던 길도 다닐 일 없으니 풀이 짙습니다.
이 길 끝에는 ‘숲 속 교실(숲 속 의자)’가 있는데,
겨울이면 그 숲에 들어 쌓인 낙엽들 위에서 옹기종기 몇 씩 앉아 도란거릴
예쁜 의자 같은 공간들이 있는데,
지금 우리야 그런대로 간다지만
올 손님들이 찾아가기는 쉽지 않겠습니다.
해서 구비를 도는 데까지만 가다 걸음을 접었지요.

새터포도밭에 들어 그 그늘 아래서 가랑비도 그으며
포도를 참으로 먹었지요.
우리 밭이 있으니 참 좋습니다.
새터다리로 다시 나와 계곡을 따라 놓인 물꼬 수영장을 확인합니다.
“저 아래가 ‘태평양’, 이 ‘다리밑수영장’은 ‘새터수영장’으로 제대로 불러야겠지?”
그리고 아주 아주 커다란 산벚나무 아래 검은 입을 벌리고 있는 ‘검은 바위’,
그 깊이가 무려 2미터는 넘을 거라지요.

마을길을 따라 달골다리까지 이르러
1998년 여름 처음 물꼬수영장이 된 ‘원래수영장’을 짚고 달골 수영장을 거쳐
‘서해바다’에 이릅니다.
처음엔 너르다 하여 동해바다로 불렸으나
그 지형이 서해바다를 더 닮았기에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지요.
이제부터는 계곡을 타고 오르는 겁니다.
아주 아주 큰 태풍이 지나간 뒤 참 많이도 변한 계곡입니다.
그간 자연재해를 줄이겠다고 되려 손을 많이 댄 것이
정말 자연재해를 줄여줄까 싶어요.
“감동이예요.”
지난 번 좀 말라있던 것과 달리, 또 이 흐린 날의 더 웅장하게 뵈는 ‘거인폭포’는
우리를 오래 머물게 했네요.
거미처럼 벽을 타고 기어오릅니다.
안되지 싶던 종훈이까지도
이제 이쯤은 너끈하네요.
령이와 동희와 류옥하다가 앞서서 정찰병이 되었습니다.
“비밀통로예요.”
폭포 너머는 엄두도 못낼 것 같지만
여기 사는 우리는 알지요, 거기 ‘비밀통로’가 있단 걸.
축축 늘어진 나무들 그림자가 마음에도 서늘함을 일게 하는 ‘아마존’을 지나
‘도토리 폭포’를 거슬러 오르면
어느새 ‘너럭바위 서당’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둑으로 올라서면 대해리에서 돌고개(석현리) 가는 한가운데인
몇 가구 모여 있는 ‘새마을’과 만나게 되지요.
발이 젖지 않고도 무사히 계곡탐험을 끝낼 수 있답니다.
“이게 여기랑 연결되는 거예요?”
이 지점까지는 처음 온 승찬이가 아주 신기해라했지요.

신기가 신발을 벗고 젖은 양말로 앞서서 발자국을 만들고
정민이 맨발로 그 위를 걷습니다.
“여기예요.”
이 마을로 와 학교에 다니고자 하는 어떤 가정이 집을 지을 거라며
컨테이너 한 동을 가져다 놓은 곳을 아이들을 가리켰지요.
“정말 짓는대?”
“음... 아빠는 아직 외국에 계시대요.”
“애들이 커?”
“아니요, 일곱 살인가 하고 그 동생.”
아이들은 지난 학기에 학교로 찾아온 그네를 만났던 적이 있다 합니다.
“그런데 아직 안 짓네.”
“포기했나?”
“어, 호랑나비다.”
앞산에선 제비나비가 날더니
길가 포도밭엔 호랑나비가 몇 마리나 됩니다.
어느새 제가 앞서 걷고 있었지요.
뒤로 돌아보니 인물도 참말 좋은 우리 아이들.
“느티나무!”
금새 마을 지킴이 느티나무 아래까지 왔습니다.
“큰형님이네.”
누군가 그러네요.
그래서 오늘부터 그 나무는 ‘큰형님느티나무’가 되었습니다.

오후에는 마을 뒷산으로 길을 잡습니다.
학교 북동쪽이지요.
학교 앞에는 앞마을 ‘앞마’(큰마, 앞마, 본동이라 불립니다)가 있고
뒤엔 댓마(대나무밭, 죽전으로 불리지요)가 있고
그 길 끝에서 길이 갈라집니다.
왼쪽으로는 홀로 걸으며 깊이 사색할 수 있는 ‘티벳길’이 있고
이 길 맨 끝은 개를 키우는 개농장 사유지로 이어지지요.
하루에 한 차례 영동에서 들어오는 주인이 마침 온 시간이라
들어가 불독이며들을 구경도 합니다.
개가 올해 개인연구주제인 동희는 얼마나 반가워하던지요.
“나도 이 길 따라 꽃공부 해야지.”
“나는 새(개인연구주제)니까, 나도!”
물꼬 상설 3기 아이들은 처음 온 길이 썩 마음에 드나봅니다.
정민이는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강아지를 키워보면 아니 될까 고민입니다.
갈라지던 길의 오른편으로는 물꼬 계자를 다녀간 아이들에게 사연도 많은
유명한(?) 아이스링크(스케이트장/저수지)가 있답니다.

햇발동에 올라 방마다 청소부터 합니다.
앞산이고 뒷산이고 계곡이고 천지를 휘젓고 났더니
다리도 아프고 곤하기 한없는데
아이들은 어찌나 팔팔한지요.
한데모임에서 포도잔치를 위한 몇 가지 의논도 하고
달마다 어떤 주제를 놓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있는데
이번에는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책’ 이야기를 하기로 하였답니다.

“이 방에 계시네.”
“그렇게 확인해야 안심이 되는 구나?”
대여섯 차례는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동희랍니다.
“할 얘기가 있어요.”
8시부터 9시까지는 아이들과 개별적으로 얘기를 하려고 열어두기로 한 시간인데
창욱이가 들어오더니 쑥스러워 모서리에 몸을 돌리고 있습니다.
“나는 하던 일 계속하고 있을게. 준비가 되면 불러줘.”
제 쪽을 향해서도 얼굴을 가리고 섰다가 앉았다가
결국 얘기를 꺼냈지요.
나무날에 갈 산오름이 걱정이 크나 봅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으니
여름의 마지막계자에서 창대비속에 물이 엄청 분 계곡을 살아나온 경험이
되살아나기도 했을 겝니다.
“그래, 한 번 생각해 보자.”

또 문을 두드립니다.
“모기 박멸대!”
사내애들이 들어서더니 문을 닫고 모기를 잡기 시작합니다.
모기가 갑자기 이 여름 끝물에 기성을 부리고 있지요.
그런데 자기 방뿐 아니라 방마다 다니며 다 잡아주고 있습니다.
마음씀이 훌륭한 아이들이라지요.


어른들은 포도를 내기 시작하니 바쁩니다.
벌써 포도 주문이 밀리고
그래서 포도를 따고 고르고...
상품이 되지 못할 것들은 효소와 쨈과 술이 될 것입니다.
포도즙은 생물로 다 팔고 난 뒤 남은 것들로 하나
물꼬에선 좋은 것들로 짜지요.
포도즙도 다음주부터 낸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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