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12.불날. 흐림

조회 수 1173 추천 수 0 2006.09.19 16:11:00
2006. 9.12.불날. 흐림


아이들이 이제 조용합니다.
다들 잠이 들었나 보지요.
아래층으로 내려가 젊은 할아버지 밤참을 차려드리고
같이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올라왔습니다.
기숙사에 머무는 일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나 봅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날이었지요.
농사부는 농사부대로 포도 때문에 종종거립니다.

6시 50분부터 하나 둘 일어나 느리작 느리작 이불도 개고 씻고,
늦잠을 잔 이가 있어 창고동으로 건너가는 시간이 좀 늦어졌습니다.
8시 아이들 내려 보내고
이리저리 정리를 좀 하며 쫓기길래
아예 누룽지를 올려두고 마저 청소를 했습니다.
달골에서 혼자 차려먹는 아침이네요.
빨랫감을 실어 내려가 9시 공부를 시작합니다.
아침을 여는 노래와 새로 배우는 노래,
아침에 읽는 동화를 들려주고
손풀기(올 가을은 나뭇잎을 종류마다 다 다뤄 보려지요)를 하고
이번 학기 집중교과인 ‘사회’를 시작합니다.
사회라면 지리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따위를 통칭이지요.
그 가운데 역사는 이 학교에선 따로 떼서 공부를 합니다.
사회란 과목에 대해, 초등학교 전 학년에 걸쳐 어떤 걸 배우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번학기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함께 해보고 싶은 게 어떤 게 있나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첫 수업은 나를 둘러싼 ‘관계도’를 그리는 걸로 문을 열었지요.
“너무 많은 생각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사회가 시작이 너무 좋다는 나현이는
관계도를 그리며 나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알더라고 하고,
동희는 기억, 추억, 있었던 일들이 생각나더라며
내 맘이라도 모르는 게 있더라 합니다.
싫어했던 애들조차 지금은 좋다는 승찬,
옛날 기억이 자꾸 난다는 령,
너무 복잡했다며
처음엔 직선만으로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이사이 끼우고 많은 생각들이 갑자기 나고 그러더라는 류옥하다입니다.
안 좋은 기억도, 그리운 사람들도 다 관계도 안에 되살아납니다.
“고작 몇 해 살지 않은 아이들도 이렇게 복잡한 그물 속에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그런 그물망을 이루고 있지요.”
그 그물을 이해해가는 것이 ‘사회’이며
그 속에서 무엇을 할까, 어찌 살까를 생각하는 게 ‘사회’겠지요.
“‘복잡’한 관계의 그물을 이해하고
우리가 살아갈 길의 ‘단순’한 방향을 찾는다.”
뭐 이렇게 사회과 목표를 말할 수 있으려나요.

한국화며 단소며 이번 학기 첫 수업,
애들이 어찌나 샘들을 반기고 시간을 좋아들 하던지...
샘들과 우리 지은 포도도 잘 나누었지요.

일시간엔 호두를 땄습니다.
올해는 영 흉작입니다.
학교 뒤란 아래 큰 나무를 그래도 털겠다 나갔습니다.
정운오아빠가 꼭대기까지 오르고
아이들과 저는 그것을 보며 조마조마해합니다.
“호두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아.”
아이들도 아래 큰 가지만큼은 올라 장대를 휘둘렀지요.
이제는 수색입니다.
도랑에도 내려가 풀섶까지 뒤적였지요.
“200원짜리 발견!”
“600원!”
호도 한 알이 200원쯤 시장에 나간다 하니
곧 호두는 어느새 화폐가 되어 불립니다.
즐거운 보물찾기였지요.
있고 또 있고 또 또 있습디다.
이리 훑고 저리 훑었지만
그래도 남은 게 있을 걸요.
“다람쥐도 먹어야지.”

학교 남새밭에 있는 키 낮은 호두나무로도 옮겨갑니다.
먼저 간 정운오아빠가 풀을 싸악 쳐놓았습니다.
사내애들이 죄 나무를 타고 올라 흔들어대더니
한 무리는 내려와 깔아놓은 천막을 벗어난 것들을 찾아냅니다.
밭두렁에 걸터앉아 풍성한 가을을 한껏 맛보기도 하였지요
노각이라 일컫는 늙은 오이도 따오고 밤도 까고 호두도 까먹고...
상설 3기 아이들은 호두를 처음 따본다 합니다.
“(호두가)떨어질 때 기분이 되게 좋았어요.”
열매란 게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가을이 즐겁고 고마운 걸 겝니다.

휴우, 불날은 좀 빡빡한 하루입니다.
저녁 먹기 전 ‘우리가락’도 있지요.
한동안 손을 놓고 있었으니 소리 만들기가 필요하겠지요.
선반을 하다 앉아서 치니 일도 아니라는 아이들입니다.
그래도 또 처음처럼 하면
마치 처음처럼 새로운 소리가 만들어지고는 합니다.

기숙사로 돌아옵니다.
낼 부터는 오자마자 한데모임을 한 다음
비질과 걸레질을 하고 이불을 깔아두기로 하였지요.
아침에는 떨어진 것들을 줍기만 하자 하고.
방마다야 저들 알아서 몫을 정하자 했습니다.
위 아래층 마루와 거실 부엌, 그리고 욕실은 제가 맡았지요.

양말과 팬티를 빨고 있는 이가 셋 밖에 안돼
다시 확인하고 빨래통에서 속옷들을 아예 빼둡니다.
못 챙기고 있었다 합니다.
이제 알았으면 빨면 되겠지요.
그쯤은 하고 살기로 하였습니다.
아래층 욕실은 샤워용으로는 잘 쓰지 않는데,
목욕용품을 챙겨놓아야겠다는 의견도 나옵니다.
아주 추울 때는 한 쪽을 틀 때 다른 쪽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쓰기 불편하지만
아직은 잘 쓸 수 있겠다고.
이렇게 하나하나 기숙사살이가 익혀져갑니다.

오늘은 청소를 하고 씻고 하다보니 한데모임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왜 공동체인지 알겠어요!”
동희는 오늘 문득 왜 기숙사인가(기숙사생활을 하는가)에 대해 깨쳤다 합니다.
더 가까워지고 더 많이 알고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깨달아가고 깊이 배우고
그러기 위해서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답니다.
기숙사가 힘들던 동희가 조금씩 자신을 설득하고 있는 있는 과정인가 봅니다.
이 아이 이렇게 성큼 자라고 있습니다.
간밤에는 잠도 푹 잘 잤다지요.
어제 새벽에도 베개를 들고 건너왔기에
이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이들 곁에 자기를 시도해보자 했거든요.

다음은 “요새 내가 읽고 있는 책” 얘기를 했습니다.
달마다 한 주제를 놓고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얘기시간을 갖는데
이번 학기에는 이렇게 중심생각을 놓았지요.
독서토론쯤 되겠습니다.
오늘은 령과 동희 정민이가 맡았는데,
우리들에게 숙제를 많이 남겼습니다.
벌레는 정말 나쁜가,
‘복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
정민이의 책은 모두가 같이 읽고 얘기 나누기로 했고
령이가 읽은 책에 나오는 걸로는 더 깊이 생각을 나눠보기로 하였지요.
굉장한 학기가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아이들과 산다’는 일이 또 이리 가슴 벅차지 뭡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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