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15.쇠날. 흐림

조회 수 1176 추천 수 0 2006.09.20 12:13:00
2006. 9.15.쇠날. 흐림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이 달골 햇발동과 창고동 대청소를 합니다.
그 사이 저는 1층 거실과 부엌을 청소하고,
후렌치토스트와 젊은 할아버지가 갓 따오신 달골포도에 우유를 차렸습니다.
“뭐 하러, 고무장갑 있는데...”
어제의 밤송이 흔적으로 아직 손등이 욱신욱신한 데다
거즈를 그대로 붙이고 있으니
아이들 두엇은 저들이 설거지를 하겠다 하지만
저들은 날마다 저녁에 가마솥방에서 하고 있는데
예서까지 하라고 싶지는 않았지요

엊저녁 홍정희엄마가 장을 보러 나간 길에 교육청에서 교과서를 실어왔습니다
(지난주부터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는
마을 아이의 병문안도 다녀왔지요).
오늘은 그걸 주욱 구경하고 정리했지요.
교무실에도 있기는 하나 빠진 게 더러 있는데
교육장님이 잘 챙겨주셔서 이번에는 모든 학년 모든 학기를 다 보게 되었답니다.
이 학교가 제도학교의 교과서를 부정하지도 않거니와
놀이삼아 지금 다른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를 아는 것도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는 하나가 되겠지요.
또, 교과서는 인류의 지적생산물의 한 증거이며
그것을 어떻게 공부하느냐가 문제이지
교과내용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생각지 않는답니다.
그 교과서로부터도 분명 배울 게 많을 겝니다.

오늘은 ‘숲이랑’이 짧았습니다.
숲 깊숙이 들기는 무리겠지요.
마침 어제 밤을 주우며 학교 둘레도 놓칠 수 없다고들 했고,
여기가 해발 500미터에 가까우니까요.
한 바퀴 휘 돌았지요.
나도미꾸리낚시와 물옥잠화, 물봉선, 유홍초가 한창이었고
밤이며 호두며 가래가 떨어져 뒹굴고 있었으며
은행은 바삐 가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고추장집 앞으로 두꺼비가 지나다 잠시 머뭇거렸고,
뿔은 날카로우며 길고 다리가 많은 본 적이 없지 싶은 곤충도 만나고
동쪽 개울에서 이름을 모르겠는 투명한 벌레도 보았지요.
언덕 너머 소가 오줌을 길게 누고 있었습니다.

몸으로 익힌 거라 그럴까요,
그리 외우자 뎀비며 한 공부도 아닌데
아이들은 지난 학기에 한 손말들을 아주 많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오늘 창욱이가 놀라웠지요.
그토록 많은 칭찬을 창욱이에게 던진 게 처음일 겝니다.
잘 안 보고 잘 안 듣고 잘 안하던 창욱이
어느새 충분히 보고 충분히 듣고 충분히 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이들은 얼마나 많은 변화기를 겪는지요.
그토록 변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말입니다.
비둘기가 꽃이 되고 사람이 사라지는 것,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마술’이라 하던가요.
사람이 변하는 것이야말로 ‘기적’이라 했습니다.
아이들의 작은 변화 변화들,
그 신비한 세계 안에서 살고 있음은 행운입니다.

영어시간이 있었습니다.
지난 학기 공부했던 것을 주욱 훑고
같이 그림동화 한 편 읽었지요.
그런 다음 학년과 상관없이 세 모둠으로 나뉘어 공부합니다.
승찬 나현 동희는 자기 수준에 맞는 읽기를 곽보원엄마랑 하고
령 정민 류옥하다는 동화책을 보며 카세트 테잎으로 저랑 같이 하고
신기 창욱 종훈이는 시디롬으로 저들끼리 놀며 공부했습니다.

한 주를 정리하며 ‘먼지풀풀’을 해도
아이들은 집에 갈 생각 없이 학교에 머물고 있습니다,
물리지도 않는 비석치기를 하며.
그런데 두 녀석이 싸웠습니다.
한 지붕 아래 이웃해 사는 두 아이에게 자주 있는 일이지요.
그리고, 한 녀석이 저녁 먹도록 뵈지 않습니다.
‘비도 오는데 어딜 갔나...’
꼭 이렇습니다,
저 아이랑 얘기가 좀 필요하겠다 싶을 때
한 발 늦게 됩니다.
이번 주를 보내며 그 녀석에게 계속 마음이 머물러 왔습니다.
동생일로 엄마가 멀리 있으니 날도 섰을 겝니다.
그렇더라도 마치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때 여럿과 부딪히던 것처럼
계속 몇몇과 다투고 있어 방학이 너무 길었나 생각하기도 하면서
마주 앉아 얘기 한 번 나누어야겠다 하고 있었지요.
어린 날 어른한테 혼이 나면 옷장에 콕 들어가기도 했다는 여러 사람들의 전언대로
어른들이 방마다 옷장을 뒤지고 아이들은 온 마을을 돌았으며
저는 달골도 다녀왔지요.
동네가 한바탕 뒤집어졌더랍니다.
그런데 엄마랑 동생이 병원에 있어 다른 집에서 밥을 먹어야하는 녀석이
싸운 녀석네 가서 밥 먹을 마음이야 없었을 것이니
어디 가 버린 겝니다.
어둠이 내리고 걱정이 아주 아주 커져있을 때,
전화가 옵니다.
흘목까지 걸어가서 차를 얻어타고 다니는 임산의 교회를 갔다나요.
목사님께 영동의 병원까지 태워 달랬답니다.
읍내까지 주마다 한 차례 나가는 일이
아이들로 하여금 바깥 세상을 더 가깝게 만들어놓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데요.
그 전 기수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을을 벗어나진 않았으니까
(그렇게 뛰쳐나갈 것 같으면 날마다 같은 일을 겪어야 했으리라...).
그의 편이 돼 줄 이가 여기 하나도 없더란 말인가요.
그에게는 교회가 더 가까운 이웃이었나 봅니다.
아이에게 그저 미안함만 넘쳐서
가라앉은 하늘이 마음에 들앉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 편이란다."
오랫동안 그 말과 마음으로 제자들이 위로를 받았다 했는데...
'참 못 하고 사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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