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1.물날.흐림

조회 수 1211 추천 수 0 2006.02.02 11:58:00

2006.2.1.물날.흐림

흔적을 남겨놓은 마당은 쉬 녹아버렸으나
둘러친 봉우리들은 동양화를 그렸습니다.
새벽에 내린 싸락눈이지요.
이름난 석기봉 아니어도 둘러친 모든 산이 백두대간 같은 이곳입니다.
토끼몰이를 떠나도 좋겠는 날이라지요.
마을 어르신들도 삽짝을 나오지 않는
고요한 겨울 한낮입니다.
이렇게 살고 싶었지요,
물을 길을 땐 긷는 것에 집중하고
먹고 있을 땐 씹는 것에 집중하며
양말을 빨 땐 양말을 빠는 것에,
장작을 팰 땐 장작을 패는 것에 집중하고
아궁이 앞에선 불을 때는 것에 집중하며,
아주 잠깐 글줄이라도 읽는다면 또 읽는 거고
아니라도 별 아쉬울 것도 없이.
아름다운 날들입니다.
다만
이것이 다른 이의 삶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잘 살피는 숙제 하나가 남겠네요.
어깨앓이가 심해서 열택샘한테라도 하루 일찍 오라 전갈을 보낼까 하다
것도 그만 둡니다, 사람이 아주 죽어나가고 있는 것도 아니니.
농사짓느라 숨쉬기조차 어려울 만치 고생하고 겨울 나들이 겨우 한 주인데...
사택에 있는 전화마저 소통불능이라 바깥과의 거리가 더 먼 듯하다지요.
그런데, 얼마 전 전화로 문자란 걸 첨 보낸 일이 있었는데,
그게요, 아니까 또 보내게 되데요.
경계해야겠습디다.

"사람들 언제 와요?"
"모레."
"그럼 그때까지 이걸로 버팅겨야 하네."
설음식 광주리를 보며 아이가 우리 보낼 날을 가늠하고 있었습니다.
4학년만 돼 보라데요,
어디 엄마 말 듣고 사는 지.
그때면 그 때 식의 삶이 또 있겠지요, 뭐.
그 아이 오늘도 한참을 뵈질 않았지요.

연필 HB 16자루, 지우개 3개, 연필깎이 2개, 샤프 1개와 심통 2개, ,
연필 4B 14개, 사탕 2개, 가장 2개, 자 1개, 볼펜 2개, 목걸이 2개,
수첩 1개, 그림 3장, 삼국지 지도 1장,
머리끈 4개, 빗 1자루,
카메라 1대, 차 9대.

"발굴하러 갔다 왔어요."
아이는 상자를 들고 와
그 속에 있던 것들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보물땅굴동굴에서 파 온 거라네요.
삼국지 지도 1장이라...
아마도 보물섬을 찾아 떠나는 치들을 흉내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동안 찾아다니던 사진기도 거기 있었지요.
그 아이, 얼마 전엔 안마조정기판(기껏 종이 한 장에 그린 그림이지만)을 만들었습니다.
안마하는 손 모양 버튼들이 무려 열 가지나 그려져 있고
시간도 여러 종류가 있었지요.
예약 버튼에, 안마카드도 없고 할 때 살짝 안마를 받을 수도 있는 비상버튼까지
시작과 끝 단추도 있었습니다.
"값싸지(10원 20원 단위에다 이미 그가 쿠폰을 만들어줬으니 실제 드는 돈은 없는),
시원하지,
길어도 여전히 10원이지,
보통 안마기계는 여러 군데를 해서 안 아픈 곳도 하는데
해달라는 곳을 계속 해주지
세기도 조절할 수 있지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지
돈을 넣고 그만하고 싶어도 계속 달달거리니 낭비지
안마기계는 누워서만 하는데 이건 어떤 자세로든 되지..."
아이는 안마하는 내내 자기한테 받는 안마의 장점을 늘여놓았지요.
마을 어르신들은 가끔 텔레비전도 없는 이 산골에서 애 바보 만들겠다 걱정이시지만
아직 초등학생이어서가 아니라
저 아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갈 나이여도 이리 훌훌 살면 되지 않을 지요.
더 무엇을 얼마나 가르치고 산단 말인가요.
학부모랑 하는 적지 않은 갈등에는
정말 우리 아이 이 골짝에서 키워도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걸까 하는
우려가 깊이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겝니다,
무어라 무어라 아무리 다른 까닭들을 들먹여대더라도.
'사람답게 사는 것!', 교육의 절대적 그 목표에 다가가는데
무슨 대단한 교육내용을 바란단 말입니까.
아하, 물론 어떤 '사람답게'냐가 또한 관건이겠구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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