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3.7.불날. 맑음 / 대해리 산불

조회 수 1182 추천 수 0 2006.03.09 09:12:00

2006.3.7.불날. 맑음 / 대해리 산불

점심에는 물꼬랑 관계된 마을 식구들이랑 공동체식구들,
아이들이 모두 같이 밥상에 앉는 시간입니다.
중심식사시간인 셈이지요.
한창 밥을 먹고 있는데,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주민여러분께 알립니다.
지금 석현에서 산불이 났으니
주민여러분들은 모두 불을 끄러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연기는 뒷마을 댓마 뒤쪽, 독촉골 가기 전에서 나는데 반대편 석현이라네...'
아마도 다급해서 잘못 말씀하신 모양입니다.
이를 닦으러 간장집에 올라왔다가 방송을 듣고 가마솥방에 좇아가니
식구들도 숟가락을 놓을락 말락 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죄 가얄 것 같아요. 제가 설거지를 할 테니까..."
2시에 이번 학기 처음 시작하는 수업도 있고
아이들도 건사해야 하니
달려 나간 어른들에 이어 남아 있던 어른들을 모두 보냅니다.
삽자루와 곡괭이를 들고들 갔지요.
"애들은 위험한데..."
저들 눈에 얼마나 구경거리일 지요.
연기를 좇아갔던 아이들은 소환당해 내려옵니다.
설거지를 하며 마당 건너 나무들을 통해 바람을 가늠하는데,
이런, 바람이 점점 거세어집니다.
'석현부터 시작한 불이 여기까지 내려왔단 말인가,
불이 번지면 바로 산 아래인 이 마을은 절단 나는데,
어, 갓 지은 저 건너 우리 달골집들은?'

2시, 어느새 단소샘이 오시고
아이들과 공부를 시작합니다.
상설 1기 때 시작하려했다 악기를 구하지 못해 좌절했던 대나무 악기를
이번 학기 이렇게 다룰 수 있게 되었지요,
물론 처음 하고팠던 퉁소가 아니라 단소로 바뀌었지만.
난계국악원의 단원으로 피리를 전공하신 김성오샘이
한 해 동안 도와주기로 하셨답니다.
마칠 무렵 식구들 얼굴이 보였지요.
"불길이 잡혔어?"
북쪽에서 거세게 불어준 등성의 바람이 북으로 번져갈 불길을 막아주었고,
남으로 불길이 더는 번져나가지 못하도록
이 편 저 편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참나무잎들을 갈퀴고 간 작전이
성공한 모양입니다.
산꼭대기 가까이서 서로 만나 원 안으로 불을 모았다지요.
열택샘이 시작된 불 지점을 젤 먼저 좇아가 다잡았나 봅디다.
물꼬 남정네들이 한 몫 단단히 했겠지요?
"내가 소방대원으로 수십 년을 보냈지만
이렇게 빨리 산불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어느 소방대원이 그랬다나요.
바람이, 사람들이, 잡혀준 불길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오전에 아이들이랑 배움방에서 쓸 공책을 만들었습니다.
사실은 파는 공책에 겉표지만 저들이 만드는 거지요.
물꼬 선배들은 작년의 제목을 그대로 잇는답니다.
"그래, 나현아, 어데서고 뿌리내리고 퍼져가는 고운 산국처럼
그리 질기게 자라거라."
령이는 우주처럼 너른 마음으로 살아라고,
하다에겐 평화로우라 말해주었지요.
종훈이에겐 사자처럼 용맹하게 자라라고,
신기에겐 달려 나오는 강아지처럼 그리 따스하라고,
바위를 그린 정민이에겐 "바위처럼 굳거라.",
동희에겐 새처럼 훨훨 자유롭거라 바램을 주었지요,
승찬이는 태양처럼 밝으라 하였습니다.
고민하고 있는 창욱이에겐 모두가 자기 생각을 한 번 권해봤지요.
느티나무를 골랐답니다.
어제 심었던 우리들의 '첫걸음 예' 기념식수여서 더 인상 깊었을 라나요.
300년 넘게 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섰는 저어기 느티나무처럼
듬직히 자라라 하였습니다.

어른들은 달골 포도밭에 거름을 뿌리고 짚으로 덮었습니다.
짚은 자라나는 풀을 막아도 주고, 거름도 되겠지요.
이은영엄마 곽보원엄마 홍정희큰엄마가 열택샘이랑 젊은 할아버지랑 같이
봄볕 아래 있었더랍니다.
아이들은 새터 포도밭에서 포도나무 껍질을 벗겼지요.
저들 농사일은 해마다 이렇게 껍질을 벗기며 시작하네요.
누가 누가 길게 벗겼나,
누가 누가 깨끗하게 벗기나,
저들끼리 놀이도 합니다.
불날과 물날의 아이들 농사일은 상범샘이 맡았지요.
농사부에서 학교지원을 오면 일의 흐름이 원활하지도 않은 데다
이금제엄마가 서무행정을 맡게 되면서
교무실에서 짬도 좀 나서 가능하게 된 게지요.

"<장자>가 옥샘 책이예요? 오늘 다 읽었는데, 허무한 것이..."
"생에 대한 통찰을 주긴 하지만 힘을 내게 하는 책은 아니지."
"딱 맞네요."
법회를 다녀온 열택샘과 삼촌(젊은 할아버지)이랑
요새 열택샘이 읽고 있던 <장자>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열택샘은 힘날 일이 없냐 합니다.
"요새 그런 생각 많이 해요,
허물 많은 나를 감싸면서 식구들이 살아가는구나 하는.
혼자가 아니잖아,
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공동체식구들이 함께 있잖아.
얼마나 든든하우?"
열택샘은 힘이 좀 났을 라나요.
요즘 하는 다른 여러 생각들도 꺼내보았지요.
"산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이 왜 죽는 줄 알아요?"
"왜요?"
"자책으로."
이렇게 되기까지 잘못한 일을 생각하며 괴로워하다가 죽는 답니다.
살길을 생각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인상 깊었던 영화의 한 대사였더랍니다.
누구나 시련을 겪을 진대 원하는 만큼 겪을 수야 없지요.
어려운 시간, 냉정하게 잘못을 짚어가며 새로이 나아가면 될 일입니다.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깊지 못했구나,
많이 돌아봐지는 근자였더이다.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좋은 동료, 훌륭한 식구들과 같이 사는 일이
홍복이로구나 싶었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896 2006.3.28.불날. 눈발 옥영경 2006-03-31 1152
895 2006.3.27.달날. 맑음 옥영경 2006-03-31 1064
894 2006.3.26.해날. 맑음 옥영경 2006-03-31 1032
893 2006.3.24-5.쇠-흙날. 맑음. 떼 뜨러 가다 옥영경 2006-03-27 1472
892 2006.3.23.쇠날. 맑음 옥영경 2006-03-27 1127
891 2006.3.23.나무날. 맑음 / '두레상' 옥영경 2006-03-27 1223
890 2006.3.22.물날. 황사 옥영경 2006-03-24 1050
889 2006.3.21.불날. 맑음 옥영경 2006-03-24 1097
888 2006.3.20.달날. 맑음 옥영경 2006-03-23 1044
887 2006.3.18-9.흙-해날. 3기 첫 밥알모임 옥영경 2006-03-23 1040
886 2006.3.17.쇠날. 맑음 / 으아악, 쇠날! 옥영경 2006-03-23 1204
885 2006.3.16.나무날. 눈 옥영경 2006-03-17 1150
884 2006.3.15.물날. 맑음 옥영경 2006-03-17 929
883 2006.3.14.불날. 천지에 눈 쌓인 맑은 아침 옥영경 2006-03-17 1143
882 2006.3.13.달날. 눈보라 사이 햇살이 오다가다 옥영경 2006-03-14 1030
881 2006.3.11-12.흙-해날. 맑음 옥영경 2006-03-14 1229
880 2006.3.10.쇠날.맑음 / 삼도봉 안부-화주봉(1,207m)-우두령 옥영경 2006-03-11 1251
879 2006.3.9.나무날. 흐릿 / 조릿대집 집들이 옥영경 2006-03-11 1271
878 2006.3.8.물날. 맑음. 옥영경 2006-03-09 1028
» 2006.3.7.불날. 맑음 / 대해리 산불 옥영경 2006-03-09 1182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