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계자 엿새째, 2006.1.7.흙날.저 청한 하늘

조회 수 1279 추천 수 0 2006.01.08 21:19:00

108 계자 엿새째, 2006.1.7.흙날.저 청한 하늘

< 여기가 '먼 산'이야 >

"어느 산 오를 거예요?"
"또 민주지산 가요?"
와 보았던 녀석들은 아는 체를 합니다.
여름 내내 주마다 한 차례 올랐던 민주지산(민주지산,삼도봉,석기봉)이었지요.
"아니. 먼 산!"
"먼 산이 어디에요?"
"어딨겠어?"
"머얼리!"
"그래. 그런데 정말 그리 먼 데는 아니고 그냥 이름이 그래."
"어딨는데요?"
"저어기 보이는 석기봉(민주지산 자락) 앞에."
그렇게 길을 떠났습니다,
난데없이 이름도 없던 봉우리는 '먼 산'이라 불리고.
느지막히 아침으로 떡국을 먹고
젖지 않을 바지 아래 양말을 두 켤레씩 껴 신고
큰 대문을 나섭니다.
곰 잡으러 가거나 보물을 찾아 떠났던,
그리고 산 너머 남촌이 궁금하여 넘었던 산오름과 달리
오늘은 그저 먼 산을 한 번 밟아보자고 갑니다.
예서 구경하기 힘든 사탕과 초코파이와 건빵이 당근이 되기도 하겠지요.

여느 때랑 달리 젊은 할아버지한테 도움을 청해
앞길을 함께 먼저 갑니다.
가운데는 현애샘과 선진샘이,
아이들 끝은 태석샘과 열택샘이 맡아 오르지요.
아이 스물 하나에 어른 여섯.
대해골짝 끝 마을 돌고개(석현리)까지 오킬로미터는 족히 될 겝니다.
마을이 끝나고 산이 시작되는 그곳에서 사탕을 나눕니다.
"힘들어요, 집에 가요."
석현이도 주환이도 제 몸을 건사하기가 벌써부터 힘이 든 모양입니다.
"집으로 가는 길이라니까."
"살아서 돌아옵시다!"

도시에서 떠나 깊숙이 살고자 지은 집이 두 채나 있습디다.
개들이 지켜주고 있데요.
크고 오래도 짖어대는 개소리,
어째 오늘도 수월치 않은 산오름이 될 것만 같습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지도에도 없는 길을 이 조무래기들과 찾아 나섭니다.
무지 춥네요.
하늘은 정말이지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쨍하고 금이 갈 듯합니다.
그래서 겨울산은 더 매력이 있는 지도 모르지요,
마른 나뭇가지들 사이로 올려다보는 저 청한 하늘.

눈이 많이 쌓인, 사람들이 들어설 리 만무인 깊은 산은
이제 어데가 길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오르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입니다.
몇 차례 길을 틀고 틀었는데
다시 바윗덩어리를 만납니다.
앞에서 젊은 할아버지가 손으로 눈을 쓸며 길을 만들어 보려지만
자칫 미끄러져 천길로 떨어지기 딱이겠습니다.
"멈추자."
다시 길을 틉니다.
쉽잖습니다.
이제 능선과 능선 사이 골을 타고 오르는데,
아래에서부터 따라온 시베리안 허스키라든가 하는 개 두 마리가
게까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얘네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나만 좋다고 따라 온 거야."
종훈이지요.
그들이 비탈을 기어오르는 건 아이들에게도 구경거리입니다.
정말 시베리아 눈밭에서 크는 종인가 보지요?

"자, 먼저 가서 김밥 놓고 기다릴게."
뒤에선 그리 믿고 열심히 오고 있겠지요.
처음은 정민이와 창욱이가 처져서 열택샘 애를 태우고
산에 가서는 처진 창욱, 종훈, 빈, 주환이로 애를 좀 먹었답니다.
"의외로 종훈이는 오르막을 잘 가요, 그 무게로 발을 콱콱 찍으면서.
그런데 빈이는 워낙 가벼우니까 그대로 자꾸 미끄러지고..."
빈이가 정말 고생했을 겝니다.
종훈이는 같은 또래들끼리 어불리니 애기소리도 안내더라지요.
시근이 아주 멀쩡하다니까요.

더는 젊은 할아버지만 의지할 일이 아니어서
같이 나섭니다.
아이들을 세우고 양편으로 나눠 길을 더듬습니다.
몸이 팔팔할 땐 더듬이처럼 감각이 서서 마구 헤쳐 가던 산길인데...
바로 앞에 정상을 놓고도 거기에 닿는 저 능선을 타지 못해
속을 태웁니다.
결국 고른 70도도 넘지 싶은 직진길,
개 두 마리가 먼저 오르다 깨깽거리기 시작해서 올려다보니
오도 가도 못 하고 버팅기고 섰는데,
결국은 눈길에 미끄러져내리고 있었습니다.
아이구, 애들을 저리 잡겠네,
다시 길을 틀어 작은 바위산에 이르렀지요.
앞에서 그럴 동안 영문 모르는 뒷패는
저들과 거리가 별로 차이가 안 나네 했을 겝니다.
아마도 오늘의 정상은 여기여야 할 것 같네요.

동휘와 재화는 오는 내내 쉴새 없이 불평을 했다지요.
"쥐 잡는다 그래놓고 쥐도 안 잡고..."
맨날 거짓말만하고, 뭐 그런 대사들이었겠지요.
그런데 곁에 있던 동희가 그랬답니다.
"그거는 재미를 더할라 그런 거지."
그럴 땐 슬쩍 맞장구쳐줘야 하는데,
곧은 소리 잘하는 동희라니...
"저 높은 데서 밥을 어떻게 먹어?"
"그래, 저 추운데서..."
"다 알아서 준비해주시겠지, 무슨 장치를 마련했겠지."
그런데 이번엔 석현이가 글쎄 그랬다는 겁니다.
어휴, 기특한 것들...
그런데 이제 석현이도 슬슬 힘이 듭니다.
"계속 가야 돼요?"
"그럼, 가지 마."
"옥샘이 다이어트 하래요."
"그래도 니가 안 한다 그러면 되지. 옥샘한테 말해."
"옥샘이 저 앞에 가 있잖아요."
그러니 또 오르는 게지요.
기홍이와 석현이, 그런 앙숙이 없지요.
맨날 싸우면서 비탈길을 오르면서는
"빨리 와."
"조심해."
그럴 수 없이 사이가 좋더라지요.
그래서 산을 갑니다,
우리들의 동지애를 확인하러.
종훈이랑 예지가 어느새 나란히 걷고 있더라지요.
나중에 태석샘이 예지한테 물었더랍니다.
"종훈이 좋아?"
"무겁지만 귀여워요."

바위산에 먼저 이르러 뒤에 오는 이들을 독려합니다.
젖은 발이며 쑤시는 양팔이며 어쩔 줄 몰라 털퍼덕 앉았는데,
선진샘도 도로 내려가 아이들을 끌고
샘들이 사이사이에서 애들 뒤를 받치고 있지요.
어른들의 적절한 움직임이 걱정을 덜어줍니다.
승호는 마지막 고비에서 허스키처럼 오도 가도 못하고 울고 있습니다.
건창이며 내려가 손을 뻗치지만 그저 울고 또 울지요.
날은 춥고 손은 얼고 발은 젖었을 겝니다.
울만큼 울자 또 올라오지요, 여기는 산이니까요.
태석샘은 지고 오던 작은 스치로폼상자가 떨어져 애를 먹고 있는데,
한슬이가 달려가 받아오고
그걸 다시 승현이가 받습니다.
옆에 오가는 개가 싫어 더 했겠지만
온통 발이 젖은 신기가 이제 울어댑니다.
겨울 산, 제 건사 제가 하지 않으면 안되지요.
목숨이 걸려있으니까요.
아이젠이 두 쪽이어도 한 쪽을 내밀지 않는 게 겨울 산오름의 원칙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내려갈 테지요,
거기 집이 있으니까.
신기 신발 속 눈을 다 털어냅니다.
양말은 이미 반이 넘게 젖었습니다.
열택샘이 이리저리 살펴줍니다.
아마 다른 애들도 더했음 더했지 덜하지 않았겠지요.
나름대로 어떤 한계선들을 넘고 있었을 겝니다.

김밥을 먹습니다, 누군들 맛나지 않았을까요.
모자랍니다.
이젠 건빵이지요.
그 추운 곳에서 아이들은 그 속에 든 별사탕을 나눠먹느라
온 신경을 모으고 있었지요.
초코파이도 두 개씩 채웁니다.
"아직도 멀었어요?"
"아이다, 여가 먼 산이다."
"이야!"
그러나 한편에선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뭐가 이래요, 저기 저 봉우리는 뭐예요, 저거 아니예요?"
"아이다, 이게 먼 산이라니까, 이 바윗덩어리 이름이."
이제 내려간다 하니 역시 정상에서 바라다보는 풍경을 보지 못해선지
아무래도 뭔가 석연찮은 분위기입니다.
이럴 때 물러나면 아니되지요.
빡빡 우겼습니다, 여가 먼 산이라고.
이만치 왔음 됐지요, 뭐.

내려오는 길,
그럴려고 갔던가 봅니다.
너무도 가팔랐을 길인지라 그만큼 미끄럽기 더했겠지요.
그토록이나 힘에 겨웠던 오름만큼 길은 일사천리 스키슬로프입니다.
"쉼 없이 내리 갑니다. 학교에서 만나겠습니다."
앞에서 길을 잡습니다.
나머지 샘들한테는 맨 뒤를 모두 맡아 달라 부탁합니다.
어휴, 말 떨어지기 무섭게 발을 딛자마자 몸이 미끄러지기 시작합니다.
"봐, 준비해둔 눈썰매장이라니까."
열택샘은 신기를 처음부터 들춰 업고 옵니다.
발이 벌개서 열택샘이 목도리를 돌돌 감아주었지요.
"한달 내내 (우두령에서) 나무를 졌잖아요."
그래서 헤꿉한 아이 하나쯤 암것도 아니었다지요.
게다 신기가 좀 말랐어야 말이지요.
웬만큼 오다 신기가 내렸는데, 도저히 안되겠던지 또 울더랍니다.
그래서 안고 왔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더라지요.

기홍 동희 건창 류옥하다 홍관이가 바짝 저를 따랐습니다.
멀리서 한슬이가 그랬지요.
"옥샘 다리는 세련됐어요."
누가 들으면 아주 날씬한 다리쯤으로 알겠지요?
사실은 걸음이 빠르다는 뜻이랍니다.
오를 땐 기어이 따라 잡더니
내려올 땐 어느 순간 뵈지 않으니 뒷패에 더해졌겠지요.
산 속 외딴 집 옆길로 내려서자
이제 위험한 지대를 벗어났다 여유로와져
아이들은 아주 본격적으로 썰매를 탑니다.
그러다 가로로 누워 데굴거리며 가요.
"가만히 누워서요, 힘을 쫘악 빼면요, 기냥 굴러가요."
어찌나 신나게들 타는지,
양말이 다 젖고 어깨가 아파 정신이 없는 가운데도
그걸 다 따라했다니까요.
정말 정말 데굴데굴 가는 겁니다.
아, 그럴 때 없는 사진기 타령을 하지요.
오늘은 또 저 뒤에 오는 선진샘한테 쥐어줬더라지요.
아이들과 이럴 때 밀려오는 감정,
그것을 서슴지 않고 '행복'이라 부를 수 있을 겝니다.
천국과 정토를 그럴 때 경험한다지요.

얼른 양말을 갈아 신고 신기를 태우러 갑니다.
열택샘이 계속 안고 오겠지요.
"신기만 타라."
잠이 든 신기가 뉘어지고,
측은한 눈길로 쳐다보는 마지막패들의 눈길을 외면하고
야박하게 내려옵니다.
돌고개에서 대해리 마을로 오는 길이 북으로 난 골짝을 따라 있어
그 맞바람이 만만찮지요.
그래도 꾸역꾸역 학교 대문까지 와보면 마음 뿌듯하기가 다를 겝니다.

한데모임은 산을 오른 무용담을 듣는 자리쯤 되었지요.
"열택샘한테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늦은 저녁을 먹은 신기가 들어오자 현애샘과 선진샘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지요, 그림도 그리고.
아직 글씨가 서툰 신기의 말을 받아 샘들이 쓴 걸
다시 저가 잘 받아 적어 한데모임 하기 전 내밀었답니다.
"하늘이 너무 파랬어요."
"내려올 때 길을 잘못 든 줄 알았는데,
눈 속에 발자국이 있어서 무사히 왔어요."
"손이 얼어서 깨지는 것 같았어요."
"양말이 다 젖었어요."
"너무 추웠어요."
"올라갈 땐 힘들었는데, 썰매가 정말 재밌었어요."
"이 겨울에도 땀을 흘려보아서 좋았어요."
"소희샘이 거짓말 쳤어요, 어제 언덕이라 그랬는데..."
"잘못된 정보를 전하고 그 말을 감당할 수가 없어 오늘 나간 거라니까."
돌아와 따뜻한 방바닥에 난로 켜고 앉으니
다들 살만해진 게지요.
이틀만 지나면 또 가자 해도 나설 겝니다,
그게 또 산에 오른 맛일 테니.
"그래서! 다음 주 흙날엔 '가깐 산'을 가기로 합니다."
"정말 가까워요?"
"이름이 그렇다니까."

늘 아이들과 힘든 과정을 겪고 나면 그래요,
참 놀라운 존재들이다...
우리 새끼들, 오늘 참말 욕봤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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