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계자 열 사흗날, 2006.1.14.흙날. 맑음

조회 수 1402 추천 수 0 2006.01.15 22:37:00

108 계자 열 사흗날, 2006.1.14.흙날. 맑음

< 가깐 산 >

영동 황간 쪽에서 오다 보면
면소재지 상촌에서 둘러친 큰 산으로 길이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지는데
왼편으로는 우두령을 향해 흥덕리로 가고
오른편으로는 무주 용화를 향해 고자리로,
그리고 가운데 있는 길이 민주지산을 향해 물한계곡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니 가운데 그 길 어드메서 너머 너머 오른편으로 가면 물한계곡이요
너머 너머 왼편으로 가면 우두령을 향한 어디쯤인 게지요.
학교 뒤란을 돌아 댓마를 바로 벗어나
밭들 사이 사이로 걷다보면 어느새 마을 동쪽 산기슭에 닿고
그 산을 넘으면 흥덕리 길에 있는 궁촌을 만나게 된답니다.
그 산이, 우리들이 이번 계자에서 붙인 이름,
'가깐 산'이라지요.
"어딨다고?"
"가까이요."
"이름이 그렇대."

지영샘과 희정샘이 지키는 학교를 벗어나 길을 잡습니다.
동구 밖 서성이던 봄이 문지방으로 한 발을 내미네요.
길은 눈이 녹아 질퍽입니다.
금새 땀이 챕니다.
"양말 호주머니에 챙겼어요."
'먼 산'을 오르며 얼었던 경험은
아이들로 하여금 나름대로 준비물들을 챙기게 했습니다.
날이 젖어있습니다.
다시 이슬비가 얹힙니다.
구불구불 밭들을 도란거리며 걷는 사이
산 들머리에 성큼 닿았지요.
오르자마자 몇 십 년씩은 컸을 낙엽송들이 베어 넘어진 것을 만납니다.
통나무 하나는 작은 골짝을 가로질러 외나무다리를 만들었네요.
그냥 가기 섭섭하였겠지요.
줄타기를 하듯 아이들이 건넙니다.
미끄러져도 긁히는 정도겠다 하고
또 한껏 해보라 하였지요.
정우가 중심을 아주 잘 잡습니다.
동휘는 가는 길에 그만 미끄러져 가지 하나를 붙잡고 대롱거렸지요.
"타고 미끄러지면 돼."
할 만하겠는 이들은 외나무를 타고 다시 건너오고
불안하다 싶으면 아래로 내려가 수북이 쌓인 잔가지들을 헤치며 되 건너옵니다.
그런데 기홍이가 쪽가위, 바느질할 때 쓰는 그 가위 있잖아요,
를 들고 잔가지를 자르고 기우뚱거리며 오고 있습니다.
"어, 어, 어!"
저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기홍아, 그걸 왜 갖고 왔어?"
"나무 자를 려구요."
제 깐에는 산오름에 대한 단단한 준비란 거지요.

다시 길을 잡습니다.
간벌을 여러 차례 하기도 하고 산소들이 많아
길은 꽤 수월합니다.
골짝 하나를 건너며 모두 앉았지요.
"여기가 바로 '가깐 산'이 시작되는 들머리야."
사탕도 나누고, 지나샘이 준비한 양갱도 나눠 챙겨 넣습니다.
깎아지른 곳이지만 그 길이가 짧아 고생이랄 것은 없는 지점을 지나니
바로 능선이네요.
안개...
"새벽 같아요."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숫가의 이른 아침 같기도 하고
물기 머금은 여름날의 새벽 같기도 합니다.
숲 속 동물들이 회의하러 모이기라도 하는 곳 같은
낙엽 수북한 공터가 우리를 맞기도 하고
둥그렇게 나무가 울타리처럼 둘러싼 산소가
놀이터처럼 우리를 부르기도 하였지요.
능선을 타는 거라 어렵지야 않지만
아이들이 딸려있는 길잡이는 아무래도 조심스럽습니다.
너무 많이 가서 길을 틀면 고개를 몇 개나 넘어야 하고
너무 덜 가 틀게 되면 달랑 한 고개를 넘어 마을이 나타나기
가늠이 힘이 듭니다.

내리막길, 젖은 나뭇잎들에 발이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어느 틈에 모두 낙엽 썰매를 탑니다.
"늦가을 같애요."
푹합니다.
날이 푹하고 낙엽이 푹하고 아이들 소리가 푹합니다.
봄이 오나 봅니다.
시원하다는 어른도 있데요.
산소 한 자리에서 도시락을 풉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홍 선수 자꾸만 덥다며 팔에서 손을 다 빼고 있습니다.
보니, 멜빵 바지 안에는 달랑 내복차림인데도 말입니다.
"벗어라."
"그래도 돼요?"
"안될 거야 있겠나?"
벗어버립니다, 씨름 선수지요.
애들이 와아 하고 소리 치니 내복을 어깨에 사선으로 묶습디다, 타잔처럼.

마을로 내려와 긴긴 길을 걷습니다.
바로 차를 타기 못내 아쉬웠지요.
노래도 부르고 수다도 떨고...
그러다 작은 도랑 얼음 위에서 썰매도 탔습니다,
넘의 집 해우소도 쓰고.
"나가서 선생님 일 보세요."
신기는 문 달린 화장실에서도
현애샘한테 멀찌기 떨어져 있으라 그리 말하는가 하면,
석현이는 대로변에서 그냥 엉덩이 내리고 볼 일을 보아
상범샘을 민망케 했다지요.
석현이 팽개쳐둔 잠바를 들고 혼자 이리 가려주고 저리 가려주었답니다.

걸을 만치 걷고 차를 얻어 타기로 합니다.
상촌을 나와서 다시 물한계곡 가는 차를 타고
다시 헐목에서 학교로 1.7킬로미터를 걷거나 또 얻어 타야지요.
트럭을 세웁니다.
웬만해선 위험하니 아이들을 짐칸에 태우려지는 않지요.
지레 애들 엉덩이 붙여놓으마 소리칩니다.
몇을 빼고는 다 올라탔지요, 샘 둘까지.
그런데 앞에 탄 녀석들이 로비를 잘해서
학교까지 한 번에 내리 왔다지요.
아이들이 아저씨한테 자기 간식을 하나씩 내밀었습니다, 고맙다고.
그런데 맨 꼬래비로 걸어오던 상범샘과 석현은
벌써 차 얻어타고 학교에 와 있더라나요.

남은 태석샘과 젊은 할아버지, 지나샘은 저랑 은하와 걸었습니다.
우루루 얼렁뚱땅 하는 새 아이 가운데는 은하만 빠져버린 게지요.
아, 물소리...
시내를 끼고 길이 이어집니다.
우리 살아가는 시간들을 나누지요.
지나샘, 어찌나 씩씩하고 건강한 사람인지요,
게다 너무나 열심히 아이들 가르치는 고교 영어교사이구요,
무엇보다 아이들 편에 서 있는 이이지요.
샘이 다녀가면 자극이 된답니다.
어느 틈에 상촌에 닿고 다시 걷다 트럭을 얻어 탔지요.
앞에 간 아이들도 그랬을 겝니다,
날이 따뜻해서 벌러덩 누울 수도 있었을 게고
저 파아란 하늘도 보았겠지요.
"학교까지 못 태워줘서..."
헐목에서 다시 걷습니다.
귀한 시간이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걷고 또 걷나 봅니다.
사유의 시간이고 사색의 시간이며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었겠지요.
앞에 간 아이들도 좀 걸었더라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산 하나를 타고 왔으니 말도 많다마다요.
"외나무다리를 무사히 건너와 다행이에요."
홍관입니다.
"돌아와 한 축구가 재밌었어요."
축구 얘길 뺄 수 없는 건창,
태워준 트럭 아저씨가 고마웠다는 예의바른 동희,
나뭇잎 썰매의 재미가 지금 이 순간도 느껴진다는 표정의 석현입니다.
"얼음 깨고 노는 게 재밌었어요."
어디 류옥하다만 그랬을 라구요.
"낼 한껏맘껏이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올랐어요."
한슬이었지요.
트럭 탄 게 재밌었다고 정우가 말하자 너도 나도 동의합니다.
"산이 힘들었어요."
유일하게 그렇게 말한 도훈이,
그래서 대단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지요.
너는 어떻게 컸길래 그러냐에서부터
지난 번 먼산에 올라보지 않아서 그런데...
일곱 살 지혜도 이제 이곳이 익었다고 큰 목소리로 말합니다,
내려올 때 길이 많이 미끄러웠다고.
"현애샘이 뭔가로 기분이 나빠 있었는데,
승호가 초코파이를 하나 줘서 놀랐어요."
우리 모두도 역시 감동했지요.
그 귀한 파이를...
자잘한 행복들이 주머니 주머니 찼을 겝니다.

"아무래도 산이 너무 가까웠던 게야."
"그래요, 너무 가뿐했던가 봐."
아이들이 진하게 마당을 휩쓸고 다닙니다.
소나무 아래 토토로집을 대대적으로 수리 보수 재건축하는 저이들,
채리 기홍 정민 좋훈 정근 정민 윤빈입니다.
"저것들이 뭐 하는 거지?"
큰 해우소 앞에서 한 무데기가 둥글게 원을 그려 가위바위보 중입니다.
승현 홍관 종휘 재화 경표 한슬 건창 도훈 동희가 있네요.
뭔 놀이를 하려나부다 했지요.
그런데 곧 석현이가 도끼 자루를 치켜듭니다.
"아니, 아니..."
달려가려다 곧 상황을 알아차렸지요.
바로 그걸 하려고 차례를 정했던 겝니다.
곁에서 한마디씩 훈수도 하는가 보네요.
곧 승호가 안에서 장갑인 듯한 것도 꺼내옵니다.
아하, 장작패기!

저녁, 마당에서 잔치가 벌어졌지요.
현애샘이 낸 기쁨상입니다, 임용고시에 붙은.
애들이 노래 노래 부르던 삼겹살과 젤리.
마당 한 켠으로 아이들이 평상을 옮기고,
그리고 불이 지펴지고 고기 익는 냄새가 퍼집니다.
먹는 애들 먹고, 노는 애들 놀고,
어둑해지니 못 먹은 녀석들이 좇아와 받아먹고...
"고맙습니다."
건창이 목소리가 젤 큽니다.
"역시 솥뚜껑이 맛있어."
"삼겹살, 마이 맛있어요."
동막골의 그 대사를 흉내도 내네요.
물이 먹고픈데 고기 서로 먹으려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형님 영환이,
커다란 대접 둘에 물을 들고 왔지요.

종훈이가 오늘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요.
숨꼬방에서 태석샘이 협박을 받고 어른하루재기에 왔지요.
"내가 잘 때까지 가지마. 내가 울면 형아들이 (샘들한테) 갈 거야."

산을 다녀오면 그래요,
마치 보물찾기를 하고 돌아온 것 같습니다.
거기 숨겨둔 보물들을 하나씩 들추며
놀라고 화안해져 돌아오지요.
찾지 못한 보물들이 아직 있어 산을 또 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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