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계자 이튿날, 2006.1.21.흙날. 맑음

조회 수 1325 추천 수 0 2006.01.22 18:34:00
109 계자 이튿날, 2006.1.21.흙날. 맑음

< 뭘 많이 멕여야지 >

작가 '서머셋 몸'의 글들은 참 소박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좋아하는 까닭도 다른 게 아닐 겝니다.
그의 반전이라는 것도 무슨 대단한 장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편 '점심'이란 작품만 봐도 그렇지요.
글을 쓰는 주인공이
어느 날 한 여자독자로부터 비싼 호텔에서 점심을 같이 들자는 연락을 받았고,
생활비까지 탈탈 털어 대접하게 만든 그 여자의 횡포(?)가 오래 그려지고 있습니다.
20년 뒤 그 여자를 우연히 만나고 헤어지면서
그 뒷모습을 보고 고소해하는 장면이 다만 끝 몇줄에 달려있지요,
몸무게가 130킬로미터쯤 되더라는,
엄청난 복수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풋, 하고 웃게 되는.
물꼬에 사는 일이,
아이들과 함께 뒹구는 일들이 역시 그러합니다.
무슨 커다란 일들이 아닙니다.
그냥 까르르대는 그 아이 웃음 하나에
뒤뚱뒤뚱 그의 움직임 하나에
그의 유쾌한 농담 하나에
이 우주가 다 떨림을 갖는 듯하지요,
오늘 한데모임을 하기 전이었는데요,
둘러앉아 악기 반주도 없이 노래들을 불렀지요, 도란거리듯 불렀지요,
늘처럼 말입니다.
좋데요.
한데모임을 시작하고 얼마 뒤 재이가 나와 노래 하나를 불렀습니다.
아이들이 박수를 치고
큰 흥이 인 것도 아니고 다만 소박하게 자잘자잘한 웃음들이 흘렀는데,
좋데요, 정토와 천국도 딱 그만큼이겠네 그려볼 만치.

저 수다쟁이들이 그래도 아침 해건지기 시간의
몸 살리기 마음 살리기에 침묵을 지키는 걸 보면 참 희안하다지요.
저들도 분위기 안다 그거겠지요.
밥을 먹고는 손풀기를 합니다.
샘들도 손풀기 시간을 즐기고 있지요.
우리가 어른이 된 뒤로
직업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한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얼마나 될런 지요.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소희샘도
아이들이 묵언 속에 하는 집중이 좋고 놀랍더라며
오랜만에 뎃생을 한 좋은 시간이었다 합니다.

열린교실이 이어집니다.
채현 현석 민수 준희 승주 서윤 서영이 들어가서 짚을 다루고 있습니다.
비닐집에서 거름 냄새 맡으며
구멍 숭숭한 곳으로 들어오는 바람 속에
짚을 꼽니다.
"저는 때가 밀리도록 했다는데 때는 보이는데 지푸라기는 안 보이고..."
잘 안되던 모양이지요.
그래도 낼은 동아줄을 꼬자 의기 넘쳤다데요.
지영샘이 춥다고 불도 지피고, 은행도 구워먹었답디다.

뚝딱뚝딱에는 인혁 동근 석중 하승호 문희성 승엽 연호가 있습니다.
못질 망치질 톱질이 한창이었지요.
뭘 만들어내지 않아도 이미 훌륭한 시간입디다.
"우리는 소사대를 만들었어요."
학교아저씨(소사라고 불리던)가 하는 일처럼
학교 이곳 저곳 살피며 고쳐내보겠다지요.
상범샘이 소사대장이랍니다.

현주 상원 지선 희영 류옥하다는 단추를 다루고 있습니다.
새초롬한 분위기더니 단추를 조금씩 만지면서 모두 다른 개성을 보이더라지요.
사춘기가 왔다는 희영이는 매사 의욕이 없다 하더랍니다.
무채색과 튀지 않는 파스텔톤을 주로 다루며
(아마 '어둠'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들이 아닐까 싶어요),
자기 학교 얘기, 부모님께 화낸 것들도 슬그머니 내놓더라지요.
지선이도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제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더랍니다.
단순하고 간결하고 그리고 과감하게 만들었겠지요.
현주는 꼭 그가 입은 옷처럼 예쁘게 예쁘게 탑을 쌓더랍디다.
꼬박 두 시간을 어쩌면 정적일 수 있는 놀이를
끊임없는 흥미로움으로 몸과 언어로 발산하는 아이 류옥하다,
신명나게 즐기는 걸 아이들이 외려 낯설게 받아들이는 것 같더라지요.
"만들기란 영역은
소극적인 아이를 몸으로 표현하게 하고 끌어내주는 중요한 활동인 것 같다."
영선샘이 그러데요.

한땀두땀,
재이 예슬 성수 재혁 동희(글쎄, 계자를 다녀간 천다혜 선수의 동생이라지요)가 있습니다.
대동놀이에 쓸 끈 머리띠를 바느질 합니다.
물꼬에 두고 두고 쓰일 거라고 자랑스러워들 하더라지요.
"박음질은 안 해요?"
잘도 아는 채혁이.
옛적 규방처럼 바느질감 앞에 놓고 사는 얘기 했겠습니다.
"뭐가 되고 싶니?"
성수는 교수가 될 거라 하고
재혁이는 자동차 회사 사장님이 돼볼까 합니다.
"제 꿈이 뭔지 아세요? 웃지 마세요."
"코미디언이예요"
"제가 재밌는 얘기 해드릴까요?"
모두 재이가 한 말이지요.
그런 재이가 소희샘은 그저 멋있습니다.

성규 은영 태호 규리 호정 지수 박수민인 한 코 두 코 뜨개질 중입니다.
"평소에 엄마가 해서 하고팠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나서 이번 기회에 하려구요.
학원 다니고 하느라 바빠서 시간이 없거든요."
그러면서 뜨개질은 입으로 다하는 태호입니다.
잊었던 걸 되살리며 차분하게 떠 나가고 있는 호정,
지수의 도움으로 풀고 뜨기를 계속하고 있는 세 자매 은영 규리 박수민,
샘을 쿡쿡 찌르며 빨리 도와 달라 조르는 애교 많고 정 많은 성규.
"끼워! 꼬아! 빼!"
호령하는 군인처럼 선진샘은 열심히 설명을 해주고 있었지요.

태석샘이 또 나무곤충을 맡았네요.
경준 경민 영준 승재 하수민 경은 현민이가 같이 따라나섰습니다.
저만치 들을 지나 개울을 건너가고 있데요.
나무를 구하러 떠났겠지요.
양팔 가득들 안고 돌아옵니다.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이들 마냥 흡족한 저 표정들이라니...

'다 좋다'에는
태우 철원 원영 재성 현욱 준형 철순이가 들어왔네요.
"노는 게 아니었어요?"
"무슨! 세 과목이나 할 건데..."
"으윽!"
"다른 교실 아이들이 뭔가를 익힐 때 우리도 의미 있는 일을 합시다."
체육, 썰매 타러 갔습니다.
사회, 봉사활동 갔지요, 장작을 아궁이 앞으로 날랐습니다.
실과, 불 지펴 가래떡을 구웠지요.
큰 형아 태우와 원영이가 들어와 도움꾼 노릇을 해주었더랍니다.
썰매 타러 가서 수로를 따라 오르다 문득 태우가 뒤돌아보았지요.
일곱 살부터 보았던 그 아이,
이제 열 넷이 됩니다.
어느새 얼굴에 청년의 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더이다.
아, 한 아이가 그리 자라고 있었지요!

보글보글방이 점심때건지기에 있었습니다,
'손 큰 아이들의 만두 빚기'.
여유로이 책방에서 그림동화 하나 같이 읽고 가마솥방으로 옮겨가
조근조금 자근자근 움직이는 모둠이 있는가 하면,
일찌감치 하고 끝내자 서두르며 시끌벅적한 모둠도 있고,
노래가 넘치는 모둠이 있는가 하면,
말이 넘치고 넘치는 모둠도 있습니다.
"머리가 아팠어요."
지영샘이 감기 기운으로 더 했겠지요.
"머리가 아팠겠네."
두 시간 내내 열정적으로 얘기한 지영샘한테 모두 한 마디씩 보탰지요.
태석샘네는 그런 지영샘네 모둠으로부터 넘어오는 소리에 키득거리고
상범샘네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한 장면을 장식하던,
재이의 '우기부기(?)'를 들으며 떠들썩했답니다.
"하라면 또 잘 해요."
시키고 또 시켰더라지요.
그 영화의 촌장님이 그러셨던가요,
칼도 총도 들지 않은 데도 사람들이 다 잘 따르는 그 영도력이 어데서 나오냐는 물음에?
"뭘 많이 멕여야지."
상범샘이 그러데요, 일단 멕여 놓으니 잘 놀더랍니다, 우리 새끼들.
그런데 잘 구워먹고 잘 쪄 먹고 잘 튀겨 먹고는
가마솥방 바닥을 청소하는데 빗자루 쓸 줄을 모르더라지요.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청소기들이 있을 것이니.
도구를 쓰는 법부터 잘 알려주라고 희정샘이 주문합니다.
새끼일꾼 미리형님,
"내가 학생으로서 가장 싫어하는 게 샘들의 권위주의적인 명령인데..."
아이들을 차례대로 하도록(칼질, 도마질) 시켜주는 그 단순한 일이
너무나 어렵더라며
자기도 어느 틈에 설명도 않고 시키는 어른의 모습이 되어 있더라지요.
아이들을 만나는 일, 그렇지요,
거울처럼 자신을 섬뜩하게 마주보는 일이고 말지요.

이틀 동안 한 우리 가락,
서로 펼쳐 보여주었습니다.
고래방의 절반씩을 차지하고 마주 앉아
모양 있게 풍물을 치고 민요를 불렀지요.
나와서는 장작을 날랐더랍니다.
자그만 여자 애들이 씩씩하게 해서
뺑실뺑실 돌기만 하는 태호며들을 얼굴 붉히게 했지요.
"큰 거 주세요."
"하나 더 주세요."
"저거(큰 거) 주세요."

남자 화장실이 냄새가 많이 난답니다.
"그게요..."
류옥하다가 나름대로 설명을 하지만
그게 냄새를 없애주는 건 아니지요.
"아침에 청소를 하면 좀 나을 겁니다."
낼 아침에 같이 청소를 해주지 않겠냐니까
상원이랑 태호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순간, 영웅이 되었지요.
워낙 말 많아서 받던 눈총을 한 방에 날려버린 게지요.
그런데 석중이랑 하승호가 그러더랍니다.
"화장실 청소하면 뭐 줘요?"
주면 하겠다는 걸까요?

사건 사고지요.
지준이가 다친 손가락을 기어이 헤집어(?) 아주 벌어졌지요.
"도대체 조심이라고는 없이..."
다시 피나고, 들여다보니 으윽, 이만큼 벌어져있습니다.
남은 날들 아직 여러 날인데 아무래도 꿰매야겠습니다.
웬만한 상처도 꿰매는 게 아무는 데도 더 낫다하니,
그래, 나가서 바느질 하고 왔지요.
이제 경준입니다.
'상상아지트'라고 상설학교 아이들이 짓다만 귀틀집이 있는데
새해 농사에 쓸 짚을 채워놓았지요.
놀기 좋을 밖에요.
저녁답에 정글짐처럼 기어 올라가
짚단 위에서 마치 침대에서 덤블링하듯 놀았습니다.
낙엽송 잔가시 박혔다고 찾아온 이들은 다 상상아지트를 기어 올라간 증거였지요.
어느 순간 위험하겠다고 다들 내려오라 해놓고 돌아섰는데,
이런, 지준이와 경준이 잘라놓은 나무를 서로 가지겠다 하다가 그만...
경준이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얼굴을 긁혔지요, 입술도 부르트고
팔도 들어보고 다리도 들어보고 목도 움직여봅니다.
말짱합니다.
휴우, 머리도 아니고 눈도 아닙니다.
"너네 부모님이 좋은 일 많이 하고 사셨나 부다.
그렇게 떨어졌는데도 이렇게 멀쩡하니..."
이도 살펴보지요, 하나가 살짝 흔들리는데,
치과를 가야하는 건 아니겠습디다.
교무실 난롯가에서 속상함을 내리고 있던 경준에게 물었습니다.
"지준이 이놈도 대동놀이 가지 마라 그러까?"
어, 그런데 진짜 그러라데요, 거울 찾더니 들여다본 뒤로 더 화가 난 경준입니다.
대동놀이 다녀오니 지준이 시무룩히 있더라지요.
"니들 앉아서 무슨 얘기 했냐?"
"미안하다 그랬어요."
"그러니 뭐라데?"
"'괜찮다'고."
우리는 우리를 늘 돌보아주는 거대한 힘에 또 고마워라 했지요.
병원에는 가지 않아도 되겠는데,
자고 일어나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샘들 하루재기.
"아이들을 봐 오는 일이 참 즐겁고 행복한 것 같다."
소희샘이네요.
저(자신)도 초등 4년 때부터 어린이 극단 물꼬에 연극을 하러 왔었고
새끼 일꾼을 거쳐 품앗이가 되었는데,
이제 일곱 살부터 왔던 태우며 자란 아이들보고
흐뭇해라 하고 있습니다.
세이샘이 왔지요,
덥석 손을 맞잡습니다.
대학 1학년 때 처음 물꼬를 왔고,
나이 스물일곱이 된 초등특수교사입니다.
고민 많고 진지하던 그 해 구월의 그의 눈빛과 음성을 기억합니다.
아이들 '스물두 살'연극에 뒷배(스텝)로 같이 움직이던 때,
"제 나이도 스물 둘인데..."
하며 전태일의 일대기 앞에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던 청년이었지요.
오래 사람들을 만나면
각자의 꿈들이 영글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기록자 혹은 관찰자가 됩니다.
서로 격려하고 힘이 되는 일, 사람인 게 기쁜 순간이라지요.
밤새 아궁이를 지킨 정상열님, 아주 뜨끈하게 잘 자고 일어났다며 나오셨습니다.
"저녁, 별보며 행복감 같은 게 들었습니다.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들이 있고,
아이들도 관심을 가져주고, 제가 안따라 줘서...
이름을 물어보지만 잘 안 외워지고, 헷갈리고..."
젊은 할아버지는 이번 아이들이 겁나게 논다고 마음 쓰여 하시네요.
그리 거칠진 않은데 움직임이 좀 크나 봅니다.
선진샘은 예슬이랑 나눈 얘기를 전했습니다.
"선생님, 꿈이 뭐였어요, 어렸을 때?"
"유치원 선생님!"
"지금은요?"
"지금도."
"그러면 꿈을 이뤘네요, 꿈을 잘 간직했던가 봐요."
물꼬의 꿈도 그러하였지요.
우리들이 안은 바램들이 잘 품어 져서 이뤄지길 바랍니다.

낮에 아이들과 논을 떠돌았더랍니다,
이럴 때 경상도 어르신들은 '써대다닌다'고 하시지요.
청아한 하늘같은 느낌의 겨울들에서
문득 살고 있는 생을 좀 다르게 걸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삶을 살아도 괜찮겠다...'
올 해 신춘문예에는 나이 예순으로 등단한 분이 계시다지요.
자기 삶의 구력을 키워 끊임없이 반란하며 살고픈,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바램이 꿈틀거리더이다.
'자연'은 우리 삶 안에서 얼마나 자주 바람이 되고 거울 되고
품이 되고 사랑이 되던 지요...
겨울들에 부는 됫바람이 온 가슴을 훑었더이다,
이제 모진 기가 숨죽고 봄 기운이 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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