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20.불날.눈 빛나다 / 내가 장갑 어디다 줬나 보러 왔다 그래

눈이 발목까지 쌓인 이 아침에도 아이들은 운동장을 뛰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라지요.
열택샘이 애쓰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로 하고 지켜내기가 어디 쉽던가요.
대단들 합니다.

"식사 하셨어요?"
"우리는 궁해서 세 끼 밥 다 못 먹어요."
"저도 집에서 못 얻어먹고 왔는데, 여기 오니까 죽을 주더라고..."
정운오아빠가 김천에서 넘어오셨습니다.
고래방 앞에 자르지도 못하고 쌓아놓은 나무가 걸리셨던 모양입니다.
워낙에 네 일 내 일 없는 분이라 들었던 터이지요.
"완전히 집이 한 채데요, 유리까지 다니까."
된장집 뒤란에 보일러집을 같이 지었던 젊은 할아버지는
정운오아빠가 뚝딱거려놓은 품새에 그만 입이 다 벌어지셨답니다.
장작을 패던 일은 해오던 이들이 계속하고,
재주 있는 그이에겐 또 그 재주를 쓰게 했던가 보지요.
"삼촌, 그러면 입학이야?"
정운오아빠네를 2006학년도 특별전형으로 뽑아야 한다고
난롯가에서 한바탕들 웃었더이다.
좋은 날 다 두고 꼭 이리 추울 적 일을 벌인다고
욕이나 안했을라나 모르겠습니다.
저녁도 안들고 가셨는데...
만져놓고 가신 걸 보노라니, 어찌나 마음이 든든한 지요.

"누가 붙잡았어요."
그날 나갔으면 아주 험한 꼴 보았을 거랍니다.
"저녁에 못 들어왔을 거요."
젊은 할아버지가 흙날에 구른 차 사고를 들먹이고 계셨습니다.
"물꼬가 올 해 참 어려운 해요."
그러게요, 올 한 해 갖가지 꼴을 다 보았네요.
"그리 비가 많이 와서 돌이 굴러 내리고 그러는데도 우리가 들어가니까 멎고..."
물난리도 눈바람도 용케 피해갔더랍니다.
"부모들도 잘 하고, 우리가 잘해야 돼요."
하늘도 이렇게 돌보아주는데 우리도 애를 써야지 않냐는 말씀이십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큰 품을 서로들 느끼며 살았나 봅니다.
잘 살아야겠습니다.

품앗이 김효진이모가 다녀갔습니다,
귤을 한 상자 들고.
생각이 많이 났다며 눈길을 헤치고 왔지요.
"열택샘, 크리스마스 선물이예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요.
효진이모 온 게 열택샘한테 선물이라네요, 애들이.
물리치료사라고 아프다는 제 어깨도 잘 풀어주고 가셨답니다.

오늘 프린터기가 문제가 생겨 그 회사 직원이 다녀갔지요.
난롯가에서 차를 한 잔 마셨다는데
채규가 국화샘을 따라왔던 손주가 두고 간 장갑을 교무실 제 책상에 두러왔다가
그이의 좌악 빗어 넘긴 머리를 인상깊게 본 모양입니다.
짐작컨대 되게 재밌더라, 기름도 바르고, 뭐 그런 말들을 쏟았겠지요.
다른 애들은 또 궁금해서 엉덩이가 달싹거렸을 게고.
"그런데, 뭐라 그러고 구경을 가지?"
"내가 장갑 어디다 뒀나 보러 왔다 그래."
역시 우리의 채규선수였겠지요.
해서 아이들이 우르르 그이를 보러 갔는데,
상범샘은 참 이상하더랍니다.
애들이 말은 상범샘을 향해 하는데,
눈은 다 그이를 쳐다보고 있더라나요.
산골 아이들이 사는 재미의 한 자락이랍니다.

이번 학년도 국화 마지막 시간,
연하장을 만들며 갈무리했습니다.
화선지와 먹과 색과 붓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얼마나 좋은 공부가 되던 지요.
최병기샘, 늘 고맙습니다, 내년 봄학기에 뵙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816 108 계자 엿새째, 2006.1.7.흙날.저 청한 하늘 옥영경 2006-01-08 1283
815 108 계자 닷새째, 2006.1.6.쇠날. 꽁꽁 언 대해리 옥영경 2006-01-08 1420
814 108 계자 나흘째, 2006.1.5.나무날.얼어붙은 하늘 옥영경 2006-01-06 1443
813 108 계자 사흘째, 2006.1.4.물날.흐림 옥영경 2006-01-05 1377
812 108 계자 이틀째, 2006.1.3.불날.맑음 옥영경 2006-01-04 1187
811 108 계자 첫날, 2006.1.2.달날.맑음 옥영경 2006-01-03 1273
810 2006.1.1.해날 / 물구나무서서 보냈던 49일 - 둘 옥영경 2006-01-03 1220
809 2006.1.1.해날.맑음 / 계자 샘들미리모임 옥영경 2006-01-02 1174
808 2005.12.31.흙날.맑음 / 잊고 있었던 두 가지 옥영경 2006-01-02 1156
807 2005.12.30.쇠날.맑음 / 우리들의 어머니 옥영경 2006-01-02 1249
806 2005.12.29.나무날.맑음 / 젊은 할아버지가 내신 밥상 옥영경 2006-01-02 1258
805 2005.12.28.물날.맑음 / 할아버지의 봄맞이처럼 옥영경 2005-12-29 1180
804 지금, 당장, 평화롭기, 정작 나도 자주 잊어버리지만! (2005.10) 옥영경 2005-12-28 1277
803 혹 다른 삶을 꿈꾸시나요? (2005.10) 옥영경 2005-12-28 1305
802 2005.12.27.불날.날이 풀렸다네요 / 해갈이 잘하라고 옥영경 2005-12-28 1239
801 2005. 12.26.달날 /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옥영경 2005-12-26 1375
800 2005.12.26.달날.맑음 / 자리를 털고 옥영경 2005-12-26 1179
799 2005.12.24-6. / 눈과 바람이 채운 학교에서 옥영경 2005-12-26 1140
798 2005.12.23.쇠날.하염없이 눈 / 매듭잔치 옥영경 2005-12-26 1261
797 2005.12.22.나무날.밤새 눈 내린 뒤 맑은 아침 / "너나 잘하세요." 옥영경 2005-12-26 1253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