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16.물날.맑음 / 뚫린 구멍으로 당신이 숨쉬고 있었다

날이 차도 아이들은 뜁니다.
제가 못한다고 드러누웠으면
열택샘이 뛰거나 상범샘이 같이 뜁니다.
그런 다음 아침마다 읽어주는 동화에 흠뻑 빠져
아이들은 우리들이 산에 들어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지요
(어느 학기의 프로젝트 공부; 산에서 살아남기?).

"밖에서 해요."
"길놀이라도 하려구?"
다들 장구를 울러 매고 나옵니다.
바람 차도 가을 햇살은 굵기도 하여서
마당에 넘치고 또 넘쳤지요.
된장집 미장일을 하던 이들도
(미장일로 머물던 일꾼들이 드디어 짐을 싸서 저녁에 돌아갔네요)
학교를 들어서던 국선도샘들도
판굿 소리를 듣고 환해지셨더랍니다.
국선도 샘들은 들어오시던 걸음에
악기를 푼 아이들 틈에서 활도 쏘았지요.
"나무에 박혔어요."
지난 해부터 만들어대던 활은 제법 꼴새를 갖추더니
그 기능도 꽤 하나 봅니다.

'호숫가나무'에서 하던 보물동굴은 더 손을 못 댄 채 겨울을 맞았습니다.
어떤 일을 무리하게 마무리하기보다
때를 기다리는 게 나을 때도 있지요.
겨울 눈사태라도 나서 무너지지 않게 단도리를 잘하는 걸로 마무리합니다.
오늘은 '스스로공부'가 오후로 가서
지는 늦은 햇살을 받으며 아이들이 옴작거리고 있었네요.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뜨개질을 시작했습니다,
가마솥방에 난로도 놓였으니.
나현이와 채은이 먼저 배우면
다른 녀석들은 이네들에게 배우기로 합니다.
덧버선을 뜬다고도 하고 목도리를 뜬다고도 하네요.
희정샘이 한 몫합니다.

설이며 한가위, 또는 먼 나들이를 다녀올라치면
공동체 식구 하나는 꼭 시집을 사서 건네줍니다.
까마득히 잊고 있다
아, 나도 한 때 시를 써본 적 있었구나 하지요.
지난 한가위 역시 시집 한 권 받았으나
생뚱했더라지요.
닥친 일들에 싸여 눈에 안들기도 했겠지만
외국시를 인용하며 쓴 시가 유달리 잘 안읽히는 까닭이기도 했겠습니다.
더구나 이 시집은 온통 그랬으니 더했겠지요.
그런데 어제 어깨를 찜질하며 누웠다
뜬금없이 팔을 뻗쳐 책을 펼쳤더랬는데,
읽는 법을 바꾸니(인용시를 먼저 읽지 않고 아래 원 시를 먼저 읽는)
그제야 시가 읽히데요.
늘 아무렇지 않게 하던 것도 한 번 뒤집어 볼 량입니다.
훌렁훌렁 잘도 읽었지요, 맛난 밥상이었습니다.


물고기, 헤엄치는 사람, 배들은
물에 변화를 일으킨다
- 폴 엘뤼아르, <물고기>


헤엄치는 물고기를 완벽하게 감싸는 물, 물은 물고기
전신에 물 마사지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귤도 그렇다.
여드름 자국 송송한 귤 껍데기는 젤리 같은 과육을 완벽
하게 감싼다. 완벽하다는 것은 제 속의 것들이 숨쉴 수
있도록 치밀하게 구멍 뚫어 놓았다는 것이다. 완전 방수
의 고무장갑과 달리, 물에 담근 당신의 손이 쪼글쪼글해
지는 것은 뚫린 구멍으로 당신이 숨쉬고 있었다는 것이
다. 오래 젖은 당신의 손처럼, 나날이 내 얼굴 초췌해지
는 것은 당신이 내 속에서 숨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성복님의 '완전 방수의 고무장갑과 달리'


그리운 이들이 많은 가을인 모양입니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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