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20.나무날.맑음 / 같이 살면 되지

조회 수 1366 추천 수 0 2005.10.22 00:16:00

2005.10.20.나무날.맑음 / 같이 살면 되지

운동장이 시끌벅적합니다.
젊은 할아버지랑 방문자 김점곤 아빠는 벌써 일을 시작하셨고,
품앗이 이근샘과 열택샘, 희정샘, 상범샘이 아이들이랑 뛰고 있습니다.
새들도 바쁘고,
짐승들도 한 마디씩,
저 너머 닭도 홰를 잦칩니다.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아침마다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있는 장편동화 하나,
읽으면서 그만 목이 잠겨 헛기침을 몇 차례 하기도 하고
(글쓰기 모둠으로 가르치던 십수 년 동안 서너 차례도 더 읽었을 터인데도)
그것도 모자라 눈물이 그만 삐죽거려,
계속 읽어는 주어야 하는데 울고 앉았을 수는 없으니
한쪽 눈 닦고 읽고 다른 쪽 눈 쓰윽 닦고...
오늘은 이쪽 애비도 저쪽 애비도 마누라를 다 잃었는데
아이는 다섯이나 남겨졌는데,
앞으로 그들 살날이 우리 아이들도 걱정이었다지요.
그런데 오늘의 끝 문장을 마치고 책을 덮자 아이들 한 목소리로 그러는 겁니다.
"같이 살면 되지..."
아이들은 얼마나 상큼한 존재인지요.
그래요, 이쪽 마누라가 도망가서 저쪽 애비한테 갔다한들
그도 세상 떠난 마당에 남겨진 가족들이 같이 살면 험한 세상 힘이 되지 않을 지요.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그게 아니 된단 말입니다.

배움방 시간, 원시인들처럼 불씨를 만들어도 보고
은행도 구워먹고
그 덕에 후라이팬 밑이 불에 바로 닿는 것보다
조금 공간을 두었을 때 왜 불이 더 활발한지도 얘깃거리가 되었지요.

수영 다녀왔습니다.
가는 걸음에 한 저수지에서 노닥거렸지요.
저 가을볕의 산국들...
아이들은 꽃다발을 만들어 건네주거나 머리에 꽂기도 하고
그 더미 뒤로 숨기도 합니다.
아이들꽃이 없으면 세상이 이리 고울 수 있을 지요.
돌아올 땐 우리가 또 하나의 저수지둘레 쓰레기를 줍고 오기로 하였으나
다른 길로 오느라 못하고 말았네요.
"담 주에는 꼭 해요."

댓마 창신이네서 논 일곱 마지기 볏단을 샀습니다,
우리 짚만으로는 거름이 모자라지 싶어.
곶감 깎을 감도 들였습니다.
그런 주전부리까지 챙겨 먹을 수 있냐 궁한 살림을 입에 올리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사 먹는 곶감보다 값도 나을 테고,
무엇보다 유기농처럼 우리 손으로 말려 애들 먹인다는 기쁨이 컸던 게지요.

식구모임이 있었지요.
아이들이 한동안 손을 놓고 있던 공동체일을 다시 맡았습니다.
뺄래 걷고 개고 주인 찾아주는 일로 몰았지요,
아무래도 개를 먹이는 일은 어른이 아침 일찍 하는 게 개한테 더 좋을 듯하다고.
"거두는 게 있으려면 키우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거두는 건 재밌어 하면서 일에 소홀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자꾸 일을 건성건성하려 드는 건 아니냐 지청구도 들었지요.
잘 하겠다고 합디다.

낮에 간장집에 잠깐 올라갔는데 대접이 싱크대에 고대로 있었지요.
류옥하다가 아침을 안먹었다며 미숫가루를 타 먹는다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수영복을 챙기러 간장집에 다시 올라갔는데
그 사이 설거지가 되어 있었지요.
한 소리 안하길 잘했지,
했으면 설거지 하려던 그 아이 맘이 틀림없이 상하고 말았을 겝니다.
우리 어른들이 늘 못하는 것, 기다리는 것!

"충격이었어요."
도형이가 점심 때 한 행동에 상범샘이 붙인 말입니다.
제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도형이가 뒤로 와서 곁에 서는 거예요.
"설거지가 이렇게 많았어요?"
"응. 도와줄려고?"
그런데 그 아이 이미 팔을 걷고 있데요.
"수영 갈 시간이 다 돼서..."
겨우 1시였고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저가 수영을 좋아해서 더딜까 염려했다고 하더라도
기특한 일이다마다요.
"금새 하니까, 컵 놓는 거랑 상 닦는 것만 도와줄래?"
첨엔 아직 밥상 앞에 있던 상범샘에 시킨 줄 알았지요, 근데 아니더라구요.
우리 도형이 멋있게 형님 노릇 잘한 날이랍니다.

2006학년도를 위한 1차 서류(글)들을 교무실 식구들이 보고 있었습니다.
"샘을 좋은 교사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뭔지 아세요?"
"그야 많지."
상범샘의 말을 농담으로 받았으나 궁금했겠지요.
"샘은 애들을 (어떤 순간에도 절대) 미워하지 않아요."
요즘 제가 하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내가 아이를 맡긴다면 교사에게 어떤 걸 바라게 될까 하는.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래서 스스로 저는 나는 좋은 교사다, 정말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그거면 충분하지 뭘 더 바라냐,
다른 걸 별반 내세울 게 없는 선생이고 보니 그리 위로하던 요즘이었지요.
"그런데 부모들은 그걸 기본이라고 생각할 걸요."
희정샘이 그럽니다.
아하, 그게 또 그렇겠구나,
그런데 우리 학교 들어오는 부모들에겐 그리 말해주어야겠구나,
우리가 잘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아이 좋아하는 거겠다고,
더한 걸 원하면 다른 학교를 권해드려야겠구나,
뭘 바라는지 잘 듣고 못할 건 '못한다' 잘 말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더랬지요.
커버린 아이들, 그리고 떠난 아이들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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