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6일, 지리산 천왕봉 1915m - 하나

조회 수 1371 추천 수 0 2005.09.24 12:28:00

9월 15-6일, 지리산 천왕봉 1915m - 하나

잠을 설쳤지요.
아이들과 떠나는 산오름은 늘 오랫동안 돌아오기 힘든 길을 가는 듯 합니다,
마치 사지로 들어가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비장해지지요.
악마의 손에서 아이들을 무사히 구출해 내오리라, 악마도 없고 귀신도 없는데,
강한 의지로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지요.
떡국을 먹고 김치김밥을 싸서 차 두 대로 지리산을 향했습니다.

무주로 넘어가던 800미터 도마령에서 아이들은 벌써 산오름을 실감합니다.
차를 세우고 모두 내려
저 아래 펼쳐진, 첩첩이 둘러쳐진 산을 한참이나 건너다보고
잘 하지도 않던 사진도 찍어봅니다.

백무동에서 하동바위코스로 오르자 했지요.
한가위도 앞둔 평일이라 한산합디다.
지리산, 이렇게 불러만 보아도 가슴이 설레는,
조정래님의 태백산맥을 단 세 줄로 옮겼다는 서정춘님의 시가 먼저 떠오르는 산.

꽃 그려 새 울려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봄, 파르티잔' 전문)

박경리의 <토지>며 서정인의 <철쭉제>며 이태의 <남부군>이며
아영의 여원재와 팔랑치가 나오는 흥부전,
아, 변강쇠타령에 등구와 마천도 나오지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단 지리산인지요.

장터목까지 세 시간 삼심여분이라지만
아이들 걸음으로 쉬엄쉬엄 다섯 시간은 잡아야 될 겝니다.
정작 걷는 시간보다 다음 사람을 기다리는데 더 쓸 시간일 테지요.
가파릅니다, 만만찮음을 톡톡히 보여주는 길이지요.
아이들은 골짝을 가로지르는 다리 두 대를 건너며 산오름을 더 재밌어라 합니다.
물가로 내려가 점심밥상을 펼쳤지요.
자잘자잘, 아이들 소리가 물소리보다 더 돌돌거립니다.
산이 주는 이 거대한 위로가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뼈가 아픈 사흘이었지요.
지난 달날의 소동 뒤,
아이들은 남은 자답게 남은 이들로서,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로서
차곡차곡 제 것들을 챙기는데(어쩜 그리 야속하냐싶을 만치)
어른들이야 어디 그런가요.
교무실 책상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문득 고개 들어 문을 쳐다보다
복도를 걷다 책방을 들어서다 학교 큰 마당을 가로지르다, 그러다 그러다
후욱 끼치는 여름날 땅의 열기마냥
시도 때도 없이 떠난 아이들의 그림자가 밟히고 또 밟히고 말지요.
평생 제게는
열 한살의 예린이, 열 둘의 혜연이, 아홉 살 혜린이, 열다섯 살의 지용이일 겝니다.
부모 없는 것들도 아니고,
이 산골 궁한 살림으로부터 대처로 떠났으면 나아도 더 나을 것을
속이 이리 아플 건 뭐랍니까.
아이들의 담백함을 잘 배우고픕니다.

오를수록 가파르기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지요.
다친 마음이 몸도 크게 상하게 했겠는 며칠입니다.
잠깐 잠깐 현기증이 일었지요.
그런데 뒤로 넘어질 것 같으면 뒤에 오는 아이들이 받쳐주고
엎어질 것 같으면 앞에서 산이 받쳐주었습니다.
힘이 들라치면 산이 끌어주고 아이들이 밀어주었지요.
"하늘이 보일라 그러면 그게 능선이다.
거기까지 가면 담부터는 훨 수월할 거다."
1시간만 가면 걸을만 할 게다며 걸음을 재촉합니다.

어느새 참샘에 이르렀지요, 능선에서 멀잖은 곳.
참샘, 물맛 참 좋습니다.
가파른 길은 다 오른 셈이지요,
뭐 아직 깎아지른 길이 남았다 하나 반 마장도 안되니.
나현 령 하다 채규랑 먼저 닿았습니다.
채규가 또 무언가로 심통을 부렸겠지요.
"이눔아, 내가 네 이름을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부를 거다."
"나현이 누나도 이름 부르잖아요."
"그 이름이 그 이름이가?"
다른 애들이 냉큼 비난해주었지요.
저어기 채은이가 오고,
열택샘과 젊은 할아버지와 주훈이 삼촌이 도형이랑 닿았네요.

숨을 돌리고 다시 가방 단단히 비끄러매고 오릅니다.
갑자기 무엔가 생각나 뒤를 훽 돌았더라지요.
"야 이놈 채규야, 너는 내가 널 사랑하는 줄은 아냐?"
아, 채규가 고개를 끄덕입디다.
이네들이 나이가 들고 세상으로 나갔다
문득 힘에 겹거나 고향이 그리울 때 물꼬의 하늘을 보아주지 않을 지요,
그 걸음으로 문득 이 산골을 찾아들었을 때
거기 쭈글쭈글한 할머니인 제가 있음 좋겠습니다.
별일만 없으면 그러하겠지요...

능선에 올랐습니다.
모두 모였습니다.
"최고로 많다."
큰 산이라고, 하룻밤 묵는다고 먹을 것도 많은 가방입니다.
도란도란, 얘기는 비온 날 분 강물처럼 넘칩니다.
정말 정말 사랑스런 아이들입니다.

능선을 따라 가는 길은
몰려가며 자잘한 풍경을 즐기기에도 그만이지요.
나무 한 그루 하늘 한 점에도 까르르 까르르거립니다.
도형이가 뵈지 않아(이제 채은이는 앞패에 더해졌지요) 한참을 기다리는데
전령이 왔습니다.
주훈이 삼촌이 열택샘, 도형이를 기다릴 테니 앞서 가라네요.
젊은 할아버지도 그 곁에 남고
앞서가던 모두는 능선을 계속 탑니다.
장터목산장 얼핏설핏 보이는, 다시 산허리를 에두르며 이어진 숲길 들어서기 전
넓적바우 혹 아셔요,
누구랄 것 없이 꼭 올라 다리쉼을 하는?
우리 역시 거기서 아리랑 타령 하나 배워 불러 젖혔더라지요.

장터목산장,
이제 오락가락하던 안개가 천지에 자욱해졌습니다.
어떤 이는 낼 일출 보기는 걸렀다며 다시 산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닿은 사람들이 밥을 챙기고 있었지요.
우리가 거의 마지막 덩어리쯤 되겠습디다.

열택샘과 주훈이 삼촌이 밥을 합니다.
쌀도 씻어서 넣어 왔댔지요.
어, 그런데 수저가 없지 뭡니까,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꼭 이런 일이 생기고 만답니다.
다행히 어떤 분이,
그것도 물꼬를 아는,
언제 민주지산 한 번 가마며
1회용 숟가락 젓가락을 넉넉히도 주셨지요,
그렇지 않더라도 뭐 나무라도 꺾어 먹고야 말았겠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통해 살아가고 있는지요.

예약했던 대로 자리를 찾아들고
(같이 오기로 했던 네 녀석, 이제는 물꼬에 없는 아이들 이름을 거기서 또 보았네요)
담요 잘 챙겨 깐 뒤 '한줄 쫙(밤인사)'도 했습니다.
"행복하시겠어요."
우리를 보며 여럿이 그런 말씀을 던져 주셨더라지요.
아이들 먼저 들여보낸 다음 어른 넷이 소주도 한 잔 들이켰습지요.
그때,
안개로 코앞도 안보이던 거기,
한 순간 저 아래 안개 걷히고 드러낸 불빛들이 그려낸 그림은
마치 가지 못한, 우리들 발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안타까운 한 세계였답니다.

안개가 산을 집어삼키고,
국립공원 가운데 최고라는 장터목산장 남자화장실에서 보이는 풍경도 잡아먹고,
9시에 불을 끈 산장도 한입에 넣은 채
짙어가고 있는 지리산의 밤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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