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9.30.쇠날. 흐리다 부슬비

조회 수 1258 추천 수 0 2005.10.01 22:51:00

2005.9.30.쇠날. 흐리다 부슬비

학교 큰 마당 건너 돌의자 너머에 쭈욱 뻗은 전나무 세 그루 있다지요.
나무와 나무 사이 걸린 빨랫줄엔
버려진 비닐 위에다 아이들이 그려놓은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아이들이랑 보낸 여름날의 한 자락이 거기 있는 게지요.
아침, 본관 앞에 작은 의자(어린왕자가 앉았음직한)를 놓고
한 줄로 참새처럼 아이들이 앉아서
재잘대며 전나무를 흰 도화지에 그려 넣고 있습니다.

불이랑에서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불들이 나왔지요.
명장 다이달로스가 미노스의 부탁으로 만든 라비린토스(미궁)로 출발해서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실 꾸러미를 들고 가 괴물을 죽인 뒤 나온 얘기며
그 방법을 일러준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을 미노스가 미궁에 가두자
밀랍과 깃털로 날개를 만들어 날아오르나
그만 불(태양열)에 녹아버려 바다에 떨어진 안타까운 이야기...
그리고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주고
코카서스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
부당한 수난에 대한 영웅적인 인내와 압제에 항거하는 의지력의 상징으로
젊은 날의 우리들의 공책에 선명하게 이름자를 올리던 그,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도 나오고
헤파이스토스며 파에톤의 태양마차까지...
제가 더 재밌데요.
거의 잊은 것들을 아이들이 되살려주고 있었습니다.
마침 역사 시간에도 건국신화를 다루고 있는데
이렇게 준비한 것처럼 흐름을 타고 가는 우연이 고마웠지요.
탄력 좀 받고 있습니다요, 요새, 아이들 공부 말예요.

쇠날은 바쁘지요.
점심 설거지를 맡아(그래봐야 평일 사흘) 모두가 빠져나간 가마솥방에서
음악을 한껏 크게 틀어놓고 물에서 유영하듯 움직이다
어른 일모임을 끝내고 나면
한 시간씩 손말, 넘의말, 연극이 이어진답니다.
손말에선 직업에 관한 낱말들을 모아보았지요.
거기에 자기가 아는 다른 낱말을 붙여 문장도 만들어보았습니다.
넘의말시간엔 영어를 하고 있지요.
곰이랑 쥐랑 놀다가 나온 낱말들을 몸으로도 익혔습니다.
이번 학기엔 영어에 공을 좀 들이고 있다지요,
미국의 브루더호프커뮤너티랑 교류도 멀잖고
당장 내년 여름 국제워크캠프도 앞두고 있으니.
곧(언제?) 영어연극도 해보겠다는 아이들입니다.
연극요?
효립샘이 계속 특강을 온다시지만 내년으로 미뤄 달라 요청했습니다,
지금 있는 아이들도 단촐하고,
샘이 워낙 바빠 정해진 시간이 자꾸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아이 셋을 데리고 움직이는 게 너무 부담스러우실 듯도 하여,
게다 물꼬 역시 오랫동안 연극을 했던 가락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연극, 아이들과 놀기에 얼마나 신나는 놀이인지요.
무대에 하나씩 나가서 친구집에 가는 길을 표현합니다.
길을 잃어 집으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급히 가다 엎어지거나 집이 어딘지 몰라 헤매기도 하고
선물을 들고 가는 아이도 있습니다.
무대에 덩그마니 방석 하나 놓아보았지요.
그것은 아이들을 통해 신문이 되었다가 부메랑이 되었다가 종이였다가 잡지였다가
말아 베개가 되기도 했더랍니다.

단식을 할 형편은 아니고, 무엇보다 운전 때문에 말입니다,
몸의 독기를 빼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옥영경씨 말술이었는데... 담배도 안피지요? (그때)하루 두 갑은 피웠지요?"
94년 연극을 같이 했던 친구들 아니어도
술과 담배 그리고 밤새워하던 세미나, 날이 밝아서도 이어지던 토론,
어설프나마 헤엄치던 문학의 바다,...
누구나처럼 제 젊은 날도 그러하였지요, 아직도 젊습니다만.
산골 들어와 사니 꼭 그러지 말자 한 것도 아닌데
(물꼬는 그런 원칙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정말로 그러는 게 좋을까 얘기를 나누지요.
안하기로 했다 하더라도 또 어느 날 정말이냐 물어본답니다.)
술도 담배도 자연스레 멀어졌지요, 공동체식구들 모두.
그런데 지난 몇 달,
담배 피는 사람만 오면 한 대를 달라했더랍니다,
부끄럽게도 안으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밖에 있는 다른 것에 기댔다는 거지요.
비로소 열흘 전쯤부터 다시 몸을 살리고 있답니다.
우리도 예 살며 더러 좋지 못한 것들을 가까이 하게 되지요,
알고도 모르고도 거짓말도 하고 싸움질도 하고 남의 것을 탐하기도 하고,
사람살이 일어나는 모든 게 여기라고 없을 라구요.
문제는,
너무 멀리 가지 않고, 너무 긴 시간을 들이지 않고,
돌아올 수 있다는 거 아니겠는지요.
우리 아이들도 어떤 길이든 걸어갈 겝니다.
나쁜 길이 아니라면 좋겠지만, 우리가 그 길을 어찌 다 알지요.
다만 돌아올 줄 알기를 바랍니다.
혹여 너무 멀리갔더라도 다시 걸어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곳에서 사는 삶이, 이곳에서 나누는 사랑이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힘을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품앗이 태석이삼촌이랑 열택샘이 아이들을 데리고 곶감집에 오르고,
아이들 공책이며 아침에 아이들이 그린 전나무를 넘겨봅니다.
이른 봄,
시야를 가린다며 밥알 한 분이 아래쪽 가지를 다 쳐냈더랬습니다.
처음엔 겨울에 너무 황량하겠다 싶더니만
석기봉 삼도봉을 훤히 볼 수 있어 기상을 세우겠다 기뻤지요.
2004년 상설학교로 십여 년이 넘는 꿈을 펼쳐놓고
궁한 살림 어설픈 살림 바쁜 살림을 그처럼 밥알들 손길로 다 메웠습니다.
그 사이 남은 이도 있고 떠난 이도 있지요.
어디에 있건
우리 하나 하나 아이들을 잘 키워내면 세상이 달라지지 않겠는지요.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세상을 바라는 것에는 서로 다르지 않을 겝니다,
물론 어떤 행복이냐,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이냐에 대해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갖고야 있겠으나.
다들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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