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9.흙날. 맑음 / 봄학기 산오름

조회 수 2049 추천 수 0 2009.05.16 23:31:00

2009. 5. 9.흙날. 맑음 / 봄학기 산오름


달빛 곱습니다.
달골 바깥마루에 퍼질러 앉아
밤 새 우는 소리에 잠깁니다.
저 건너 골짝
개가 늑대처럼 울부짖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한 때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것도 같았으나
마음 쓰지 못하는 사이 말도 잊혔나 봅니다.

봄학기 산오름이 있었습니다.
봄학기와 가을학기를 시작하고 끝내는 네 차례
아이들과 산을 올라왔습니다.
백두대간을 구간 구간 종주하기도 하고
큰 산을 하나 목표 삼아 오르기도 했더랬지요.
비가 내려도 눈이 와도 바람 거칠어도 해왔습니다.
때로는 어둑해진 눈길 위를 달빛 별빛 길잡이 삼아
야간산행을 하기도 했고,
여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천왕봉을 향해 오른 날도 있었지요.
(방학에도 여섯 차례의 계자에서 마지막 전날이면 꼭 산에 들지요.
창대비가 내리고 눈보라 휘몰아치더라도 말입니다.)
올 봄학기는 학기 가운데 한 차례만 잡았습니다.

멀잖은 마이산을 오르기로 했던 일정을 바꾸어
천태산(714.7m.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을 오르기로 합니다.
1000미터가 넘는 고지를 오르는 것도 별스런 감흥이지만
나지막한 산은 또 그것대로 오르는 맛이 있지요.
늘처럼 우리는 그 산에서
산이 준비해둔 선물들을 찾고 풀 것입니다.
그 선물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어
그래서 간 산도 또 가게 되는 게지요.
‘천태산.
명성 높은 절에 가린 산, 짧은 산행으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코스.
식수를 충분히 준비해야 하고,
줄잡고 암벽 오르며 가는 산길에
혼잡한 산객으로 인해 산행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
자랑거리 천삼백 년의 웅장한 은행나무가 마중 나오고
그 뒤편 자랑거리 고찰의 영국사 이어
또 자랑거리 총 100m이상 줄에 의지하여 암벽을 오르는
각각 테마가 있는 산행으로 한번쯤 찾아봄에 후회 없는 산.’
어떤 이가 그리 소개하던 산입니다.

대전의 한 대학원에서 같이 수학한 이들이 모인
작은 산악회 사람들이 함께 합니다.
물꼬의 큰 논두렁 한 분이 속해 있지요.
산악대장쯤 되겠습니다.
금산에서 길이 좀 더뎌지고 있다는 연락이 있었고,
덕분에 여유가 있어서
천년 은행나무 아래서 우리는 사색에 잠겼습니다.
그저 그 나무를 보러 몇 차례나 들린 영국사입니다.

아이가 목이 꽉 부었습니다.
감기가 온 것인지 아니면
지난달 앓고 있던 원인 모르는 감염의 연장인지...
일단 산 아래 가서 오를지 말지를 결정하기로 하였는데
오를 만 하다데요.
세 살 때 이후로 버스기사가 오랜 꿈이었던 아이는
이집트가 주제였던 시카고의 도서관 여름 프로그램에 참석한 뒤로
고고인류학자의 꿈이 더해지더니
산을 타고 내리는 사이 산악인이기도 한 버스기사가 꿈이라 했더랬습니다.
여름이면 주마다 한 차례 민주지산을 오르는 그이지요.

“문 잠궈!”
명령조의 아이 말입니다.
가끔 누가 어른인가 싶지요.
지갑 챙기는 일이며 문단속을 유달리 잘 못하는
헐렁한 엄마한테 아이는 가끔 어른이 됩니다.
심지어 보호자가 되기까지 하지요.
때로 헐렁한 부모 곁에 있는 아이들은
그렇게 저가 더 야무지게 된다 싶데요.
한편, 차에 둔 네비게이터를 잃어버렸다는 누군가의 얘기 뒤로
아이는 한참 차를 세워둘 량이면
꼭 네비를 뽑아 깊숙이 넣어둡니다.
“잘 살 거야.”
그 얘기를 들은 한 샘이 그랬지요.
그러게요...

사람들이 닿았습니다.
열넷의 일행에는 안면 있는 이도 여럿이었지요.
지난 해 여름 같이들 물꼬를 찾아오기도 했더랬습니다.
“수준 차이가 심해서...”
산을 막 타기 시작한 이들도 있어
두루 편할 수 있는 나지막한 산을 주로 오르고 있다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마침 울 아이랑 동갑내기 사내애도 하나 있었습니다.
당장 좋은 친구가 되데요.

11시에 이르러서야 산에 접어들었네요.
등산로는 A B C D코스로 나뉘어있고
흔히 A코스로 올라 D코스로 내려온다는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금방 짧은 암벽로를 만나 줄을 타고 오르고
숨 돌리자마자 다시 더 깎아지른 그리고 더 길어진
암벽을 또 만납니다.
둘러서 암릉을 피하는 길을 따라 걷는 이도 있고
그예 줄을 타고 오르는 이도 있었지요.
암봉전망대에 앉아 먼 산 먼 하늘 봅니다.
그 시선 한 번 던지려고 산에 간다 싶다지요.
시간을 따로 기록할 것도 없는 가깐 산입니다.
하지만 산에 대한 익숙도에 편차가 큰 일행들이어
멀찍이 어느새 패가 갈렸지요.

오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느새 정상입니다.
산에 오르면 누구라도 벗이지요.
사람들과 너나없이 자연스레 애썼음을 나누고
마주보고 웃습니다.
사진에 같이 담기기도 하지요.
그래서 또한 산에 갑니다,
산이 주는 선물 하나가 그것이기도 하다 싶지요,
누구에게라도 마음이 그리 누그러지고 너그러워지는 것!

정상 돌탑 곁에서 밥상을 펼칩니다.
산철쭉 아직 더러 매달려도 있는 게 그제야 보입디다.
곳곳에 우르르 산에 오른 이들이 그리 모여서들 점심을 먹데요.
근교 동산에 소풍 나온 사람들 같았지요.
주로 나무날 쇠날에 잡혀왔던 산오름이라
이렇게 많은 이들을 만나는 건
천왕봉 오르던 때 말고는 첨이지 싶습니다.
덕유산도 월악산도 영축산도 한라산도 설악산도 적성산도 가지산도
그 어떤 산에서도 이리 많은 사람들을 보지 못했지요.
나름 재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도란거릴 적
나무를 기대서 혹은 숲에 들어
잠시 그리움에 젖어보기도 합니다.
먼 곳에서 이 시간 다른 산을 오르고 있는 벗이 있지요.
그는 어디쯤 길을 밟고 있을지요...
산 아래선 산이 그립다가
산에선 비로소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다시 정상에서 올라오던 길까지 되돌아가
내림길에 접어듭니다.
갈기산 전경을 향하여 걷는 꼴이 됩니다.
앞 산등 넘어 먼 곳에 툭 튀어나온 산봉들이
말 목덜미에 난 털 같다 하여 말갈기라고 하는 갈기산.
천태산과 갈기산 사이 금강 흐르고 있는 거지요.
안부 돌아 내려가니 헬기장이 보이고
곧 C코스 들머리로 접어들어 가려던 길이 맞나 갸우뚱 하는 사이
D코스 가는 길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만났지요.

그런데 으악, 사람들, 정체가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정치하는 이들은 꼭 무슨 산악회 그런 거 있데요.
마침 모의원을 중심으로 산에 오른 이들이
몇 대의 버스로 왔지 싶습니다.
번잡함이 서어하여 일행들과 떨어져 길 가에 철퍼덕 앉았습니다.
홀로 어느 산 길을 호젓하게 걷고 있을 벗이 자꾸 생각난 것은
이런 소란스러움 탓에 부러움이었나 봅니다.
다시 길을 내려 남고갯길로 뛰다시피 가다
잠시 땀을 식히며 섰는데
마침 그 의원이랑 마주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오래전 구로시흥 일대에서 일하면서 만났던 이었지요.
참 오래전이기도 한데
아직 얼굴에 그 앳된 시절이 남아있기라도 했던 모양입니다.
고개 갸우뚱거리며도 알아봄직 했으니 말입니다.
비슷한 길에 서 있다가
이제 제 갈 길들을 가고 있는 나이가 되어 만나는,
감회가 가깝게 지낸 사이가 아니어도 일렁입디다.
세월이 한참을 흘렀네요.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그리 묻다가 마흔엔 어디에 있을까 생각했고
이제 쉰에는 어디에 있을까를 묻는 나이들이 되었습니다요.
그러다 금방 늙을 테지요.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지 않을까?”
노래는 이리 이어졌지요, 아마.

채석장이 보이는 암릉에 이릅니다.
이거 보려고 왔지 싶을 만치 발을 오래 묶어두는 곳이었지요.
사람들이 웬만큼들 빠져나간 그곳에
우리 일행 몇 만이 앉았습니다.
그저 나무처럼 앉았습니다.
말이 무색하지요,
하기야 무슨 말을 할까요.
황홀했지요.
저 발 아래
마치 아프리카 대초원을 헬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뭉실뭉실 연푸른 잎들 출렁이고
멀리 에워싼 산들이 거대한 세월처럼 버티고 섰고
그리고 간간이 살을 스치는 바람...
“떨어져도 푹신할 것 같지?”
그리 묻는 이 아니어도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을 겝니다.
노래를 불렀습니다.
산에서 부르는 노래, 작은 콘서트가 되었지요.
나무와 산을 읊조린 노래를
나무와 산에 싸여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산에 취한 것처럼 노래에도 그리 취하고 있었지요.

영국사 뒤란 길,
마치 언덕에 난 오솔길 같은 느낌을 주는 길을 따라
내려옵니다.
좋은 사람과 같이 산책을 와도 좋을 길이겠습니다.
그렇게 노닥거리며 오르내렸는데도
아직 네 시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 산 퍽 마음에 듭니다,
사람 너무 많은 것만 빼면.
마치 한 산이 여러 산을 뒤섞어놓은 듯하지요.
가파른 암릉이 있는가 하면 능선줄기가 있고
달려 내려가는 경사길이다 싶으면 산책로 같은 평평한 오솔길이 이어지고
곳곳에 전망 좋은 대들이 적절히 있고
게다 고찰의 보물들이 있고...

금산에 식당을 예약해놓은 일행들한테 양해를 구하고
영동 읍내로 빠져나옵니다.
우리가 모종을 내지 않은 것들은 사들여야 하지요.
마침 장날입니다.
몇 가지 모종을 사서 싣고
황간으로 넘어갔지요.
산 아래서 꼭 마시던 막걸리처럼
아이들은 또 꼭 자장면을 먹겠다는 산오름 뒤이지요.
가끔 우리 식구들 바깥음식 먹으러 가는 곳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물론 자장면.

돌아와 씻어두었던 멸가치 효소를 담고,
다듬어두었던 가죽나물로 김치 버무려두었지요.
상온에서 닷새쯤 보내고 나면 냉장고에 들일 것입니다.

산, 그것만 타고 내려도
다른 것 굳이 가르칠 것 없다 싶은 배움터이지요.
천태산은 또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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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서울에서 잘 지내고 계세요? 보고 싶네요.

오늘 천태산에 갔어요. 아빠도 같이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쉽지만 그래서 제가 산에 가서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릴 께요.

제가 다리도 아프고, 목감기 기운도 있어서 원래는 안 갈려고 그랬는데 엄마가 기어이 가자고 해서 가게 됐어요. 원래는 농협 하나로마트 상무님이랑 갈려고 했는데, 상무님이 시간이 안 되셔서 우리끼리 가게 됐어요. 그런데 주훈이 삼촌네 산악회(이름이 기억이 안나요.) 도 천태산으로 가기로 해서 주훈이 삼촌네 산악회랑 같이 갔어요.

우리는 먼저 영국사에서 만나서 올라갔는데 거기를 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차장에 대 놓고 왔는데, 우리는 산길(지름길)로 갔어요. 영국사에는 우리나라 3대 은행나무중 하나인 ‘영국사 은행나무’ 가 있었어요. (이 은행나무는 3대 은행나무 중에 하나래요. 제가 어릴 때 엄마랑 아빠랑 같이 봤던 ‘안동 은행나무(?)’ 도 그중 하나래요.) 그 ‘영국사 은행나무는 1000년이 넘은 건데, 가지 하나가 땅에 닿아서 거기서 새 은행나무가 자란 게 가장 큰 명물(?)이래요. 하여튼 되게 웅장하고 멋있었어요.

올라갈 때는 정말 ‘이제 죽었구나’ 하는 때도 있었어요. 왜냐구요? 정말 70도~80도 암벽이 있었거든요. 그 암벽을 발 디딜 곳도 없이 밧줄만 잡고 올라갔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특히 목감기 기운이 있어서 숨차게 되니까 숨을 쉴 때마다 목이 따갑고 아팠어요. 그렇지만 처음으로 암벽등반 해본 경험도 좋은 것 같아요. 재미도 있고 암벽을 다 올라가니까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게 기분이 좋았거든요.

그리고 암벽이 많아서 그런지 정상은 정말 금방이었어요. 일단 기념사진 찍고~ 단체사진 찍고~ 했죠. 다 찍고 나서 방명록에 이름을 크게~ 적어놨어요. 그런데 정말 놀라웠던 건 정상에서 상인(?) 들이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는 거였어요. 예상외로 가격은 2~3배 인데 사람들이 많이 사더라고요. 물론 저도 엄마한테 사달라고해서 포장지를 뜯었는데 엄마가 지갑을 차에 두고 와서 주훈이 삼촌이 사주셨어요. 시원한 게 목도 덜 아파지더라고요. 되게 좋았어요.

그다음 점심을 먹었는데 사람들이랑 돗자리 깔고 차도 마시고, 딸기, 두릅도 먹고 하면서 약 1시간이 넘도록 앉아있었어요. 되게 밥이 맛있고, 차도 마시니까 정말 행복하고 ‘올라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려가는데 우리가 한가하게 왔던 건지 내려가는 길은 정말 말 그대로 사람이 막혔어요. 사람이 산에서 막히는 건 처음이라서 되게 신기했어요. 밀리긴 밀렸지만 도시사람들이 대부분이라서 내리막에서는 천천히 가고, 급경사로나 암반에서는 앉아서 갔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경사져서 안내려가는 길 옆의 험한 길을 뛰고, 점프해서 내려가니까 사람들이 이러는 거 있죠? “조심해” 라든가 “먼지난다”라는 거요. 조심하라는 건 고마운데 먼지나는 건 이해할 수 없었어요. 산에서는 원래 먼지 나고 흙이 묻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돌아왔는데 정말 목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요. 저녁은 중화음식점 ‘덕승관’에서 먹었고요, 돌아와서는 깨끗이 씻고 잤어요. 좀 힘들었지만, 오랜만에 산을 타니 되게 좋았어요.

아빠도 다음에는 같이 산 타요~
건강하세요. 그리고 다음 주에 봬요~

(류옥하다 / 열두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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