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자 열 나흘째 1월 18일 해날 눈싸라기

조회 수 1793 추천 수 0 2004.01.28 21:56:00

< 잔치 잔치 벌였네 >

호숫가 나무 아래로 갔습니다.
'무엇이 더러운 것인가'를 놓고 끈질기게 물었습니다.
'장애아가 앞에서 밥을 먹는데 구역질이 났다'던,
이번 계자 시작하던 즈음의 한 아이의 삶이
우리에게 던진 화두였댔지요.
우리들이 나눈 한 마디 한 마디의 무게를 옮길 재간이 없습니다.
마치 수행자들의 선수련 같다 한 어른이 그랬지요.
이런 깊이보기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살아있다면
우리네 삶의 야단스러움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예정에 없이 한데모임이 열렸습니다,
마을잔치를 하는 게 좋을지 안한다면 뭘 할지.
끼리끼리를 하는 시간이 뜻깊고 좋았으니
다시 그렇게 보내고 싶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우리가 여태 예서 배운 것을
이적지 살아오느라 애쓰신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잘 나눠보자고 생각을 모았고,
뭘 준비할까 의논하고, 일을 나누었지요.
초대하는 글을 지선이 쓰고,
청소를 하고 방송을 하고 모시는 글을 붙이러 나가고
잔치방을 꾸미고 음식을 나르고 어른들을 모시러 가고
오신 어른들 안내하고 신발을 정리하고...
정말 잔치요,
나는 없고 너만 있는 잔치말고
혹은 나는 있는데 네가 없는 그런 잔치말고
우리가 너나없이 있는 잔치 말입니다.
내가 진정 잔치의 주인이었던 경험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었던 걸까요.
당위나 의무가 아니라 나누는 마음에 너무나 겨워
설레며 올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는.
잔치는 그런 거였어요,
단 한사람의 소외도 일어나지 않는.

마을잔치!
눈싸라기 날리는데 그 길을 잘 짚어 어르신들 들어서십니다.
막걸리에 부침개, 떡이며 과일, 국수도 한 그릇,
아이들은 그간 배운 우리 가락들을 들려드리고
세이샘 희정샘도 불려나와 바위처럼 춤도 한 판인데
그 뒤에 주욱 늘어서서
마치 준비했던 양 몸을 같이 움직이던 아이들의 물결, 물결...
앞집 할머니 기어코 손을 끌어다 막걸리를 멕여주십니다.
할아버지들도 연거푸 잔을 넘겨오십니다.
애 새끼들 데리고 있다고 조심스러워할라 치면
한 말도 두 말도 아니고 대접 하나라며 예서도 제서도 잔이 옵니다.
노래를 들으셨으면 이제 어르신들도 해보시라 하니
마치 무슨 작정이나 하고 오신 양
할머니들 나와서 노래에다 춤,
홀로가 어려우면 두 분이 나오셔서도 하고,
우리 아이들도 질세라 울렁울렁 울렁대는 울릉도 처자들이 되었더랍니다.
지난 팔 년여 이 마을과 물꼬가 맺어왔던 세월을 생각케 되데요.
귀농을 한 이들이 가끔 찾아와 그러지요,
동네에서 자리 잘 잡은 모양이라고.
아직도 한참은 더 물꼬가 이방인일지 모르나
우리는 이렇게 대해리 식구로 섞여들고 있습니다요.
집에 다니러왔다가는 길 인사하러 부모님 찾아온
동네 총각 규중이도 부산항에 돌아오라 목청을 높이고
할아버지따라 온 중학생 손주 놈도 불려나와 무대구경을 하는데
우리의 재철샘, 노는 게 어떤 건가 봬 줍니다.
할머니들 노래 속으로 온갖 춤으로 헤집고 다니고
열택샘도 질세라 어깨춤이 한창입니다.
주춤 하셨던 할아버지들 대표로
경로당 옛 총무님 박달재를 울고 넘으셨다지요.
그런데 우리의 동주 선수,
하하, 등을 떠민 것도 아닌 데 그 틈으로 스며 춤을 춥니다.
덩달아 나가서 덩실거리는 아이들...
그렇게 아름다운 춤을 일찌기 본 적이 있기나 했는지...
그 흥에 그만 장구 메고 설장구를 한 판 추었더랬지요.
아이들의 무수한 재잘거림, 어른들의 넘치던 웃음자락들,...

그런데 그 신명넘치는 잔치상 앞에
어데서 낯선 얼굴 둘이 갑자기 들앉은 걸 봅니다.
가만보니 푸른누리에서 온 최한실샘과 장유경님이셨지요.
잔치 소문이 상주와 임실 골짜기까지 들렸던가 봅니다.
얼마 전 한 번 오시마시더니,
저희 공동체 아이 '하다' 태어난 지 백일도 못돼 만났던 연이었는데
그 아이 올 해 일곱되는 물꼬로 걸음하신 거지요.
소식도 없이 쑤욱 들어오셔서
(오는 이는 이번 주말 온다고, 맞이하는 이는 다음 주말 즈음이라 생각했던)
잔치에서 같이 흥에 겹다가
학교 공간을 어찌 쓰나 돌아도 보시고
오래 오래 아이들이랑 지내는 수다를 들으시고
제법 굵어진 눈발 헤치고 눈날리듯 가셨더랍니다.
좋은 사람들 만나면 세상 참 살 맛나지 않던가요,
잘 살고 싶더이다.
눈길 헤치고 택배를 온 아저씨도 잔치 끝물에
국수와 부침개를 드시고 떡을 싸서 돌아가셨지요,
그래요, 온 동네 잔치, 잔치 열렸던 게지요.

이번 계자 마지막 한데모임은
촛불 밝히고 한 사람 빠짐도 없이 마음들을 꺼내놓았지요.
"15일이 하루만 같았어요."
동주가 그러데요.
"보름이 사흘 같앴어요."
누구도 그러고.
석현은 손 번쩍들고 계자를 정리했습니다.
"때려서 미안합니다."
그 한마디로 맞았던 이들은 마음 다 풀어버렸더랍니다.
그래요, 마지막 한데모임은 그간의 모든 시간을 앞에 놓고
가만히 들여다본 거울이었네요.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뿐만 아니라 함께 한 어른들한테도 감동 받았다 말했더이다.

눈 깔린 운동장 가운데를 벗겨내고 굳이 불을 피웠습니다,
아쉬워, 너무 아쉬워.
불싸라기 잘도 오릅니다, 아직도 눈발 간간이 흩날리는데.
노래란 노래는 다 찾아 부르고
종이 한 장씩 던지며 우리의 바램도 그 불싸라기에 묻혔습니다.
그 불싸라기들 하늘로 올라 별이 별이 되었더이다.
구운 감자로 마지막 신명을 내며 숯검뎅이 얼굴로 강당을 휘저었지요.
감자싸움의 복작거림은 씻는 곳까지 이어집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오랜 기다림에 불편도 하였으련만
(나라면 짜증났을 거라던 한 샘의 고백처럼)
우리 아이들 얼마나 잘 참던지요.
아닙니다,
참는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레 천천히 기다리는 겁니다.

고맙지요, 감사하지요,
아이들이 있어서
우리가 같이 있어서
아무도 크게 아프거나 다치지 않아서...

여담 하나.
오늘 출장 나가던 걸음에 대중목욕탕 구경을 하지 않았겠어요.
할머니 한 분이 때를 밀어달라는데,
가야할 걸음은 바쁜데,
눈비까지 내리는데,
고백하면, 잠시 난감했지요.
그런데 천날 만날도 아니고
단 하루 아주 잠깐 어르신 때 한번도 밀어주지도 못할 바쁨이라면
버려 마땅하지 않겠나 싶데요.
등을 미는데 결이 원래의 길이 아니라 이리 비뚤 저리 비뚤하더이다.
비누로 맛사지를 하고 있으니
손으로 그 울퉁불퉁한 뼛길이 고대로 전해져요.
그만 울컥합디다.
그 세월, 그 삶, 무슨 일인들 없었을까요,
죽고 싶은 날인들 또 없었을까요.
순간,
우리 아이들 이 많은 삶의 현장에 노출시켜주어야겠다 싶더이다.
생이 가진 떨림과 울림들 속에 놓여야,
타인들 속으로 걸어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내게 요구되는 삶을 잘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구요.
그 많은 사람들 두고 굳이 제게 와서,
다른 누가 아니라 제게 와서 등 좀 밀어달라 한 부탁을 곱씹어보았지요.
어데가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부탁을 할 땐
해줄 만한 이에게 다가가지 않던가요.
들어주게 보였다면 고마울 일입니다,
참말 고마울 량입니다.
착하게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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