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계자 마지막 날 2월 9일

조회 수 1625 추천 수 0 2004.02.12 18:58:00
< 체리 세 알 >

4337년 2월 9일 달날 맑음

“그들은 나의 아이들이었고
내가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잊어버렸을 때라도 나의 아이들일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때로는 혈연관계를 초월하는 가장 신비스러운 소유의 힘에 의하여
내가 그들의 부분이듯이
그들 또한 나의 한 부분인 것이다.(p.264)”
얼마 전 아주 잘 읽은 책 <내 생애의 아이들>(가브리엘 루아)의 한 구절입니다.
잘된 번역이 감동을 배가시켜주던 책이었지요.

아이들이 갔습니다.
12시 20분 버스를 타고 나갔습니다.
구슬이 구영이 ‘하다’가 남고
영양에서 올 차를 기다리는 령이와 나현이 남고
모두 떠났습니다.
변함없이 해를 건지고 고요하게 바라보기와 몸풀기를 했고
아침을 먹고 가방을 꾸리고 다음 사람들을 위해 청소를 했지요.
11시에 글집을 들고 모두방에 모여
그간 우리들이 한 일을 되짚어 갈무리 글을 쓰고
마지막 노래를 부른 뒤 한 줄로 늘어섰습니다.
졸업식입니다.
“’마친 보람’ 받자!”
마친 보람! 흔히 말하는 졸업장이겠습니다.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진 그대가 자랑스럽”다고 애썼다고
물꼬 도장 꽉꽉 받고 덕담을 안는 자리입니다.
떠나는 사람 앞에 늘 그렇듯
더 자존심을 세워주지 못해 더 많이 바라보지 못해 못내 안타까웠지요.
눈시울이 붉어집디다.
또 볼 거라지만 한 일정을 정리하는 자리는 그래서 필요한 가봅니다.
다시 볼 때 더 잘할 것을 다짐하기 위해.
이 불편한 곳에서 애 많이 썼다,
니들이 어른이고 말고,
네가 있어서 우리 모두 더 즐거웠다,
정말 멋있는 건 그렇게 몸을 쓰고 마음을 나누는 거다,
고마워, 고마워…
버스가 뵈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또 흔듭니다.

며칠 전 잠자리에서 일어나던 정근이가 안경을 못찾은 적이 있습니다.
모두 나서서 모둠방을 엎고 서랍장을 뒤지고
개켜놓았던 이불을 죄 꺼내 뒤집고
오랜 시간 학교를 샅샅이 헤집었다가
더는 아무것도 안되겠다 싶을 즈음
샘들 셋만 정근이한테 남고
그제야 나머지는 열린교실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물론 찾았지요.
물건이 없어지고 그것을 찾고 하는 일이야 무에 대수로울라구요.
그런데 우리 아리샘이 어제 샘들 하루재기에서
그 일을 입에 올렸지요.
“물꼬만의 매력, 애들 문제를 우선으로 놓는 것에 대해
하루종일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물꼬에선 전혀 일정을 위해 애들한테 참아라 참아라,
혹은 기다려라 기다려라 하지 않고…
‘자, 이제 대대적으로 찾자.’
한 아이의 일에 전교생이 다 안경을 찾는데,
애들이 갖고 있는 지금 당면한 문제를 위해,
다른 것이 즐거울 수 없는 상황이 안되도록
아이에게 닥친 문제를 그 자리에서 풀려고 하고...
늘 보아오던 물꼬의 모습인데,
정말 제가 너무 오래 계절학교에 안왔나봐요.
반성도 많이 하고,
학교에서 우리 학급아이들에게 나는 얼마나 그렇게 해줬나,
내가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젤 중요하다고 생각한 게 무엇이었나,
오늘 하려는 수업내용, 내 중심으로만 하지 않았나…”
이곳에서 당연하게 하고 있는 일들이
아, 그런 거였구나,
그래서 우리 자신을 또 보게 되고,
우리 생각을 꾸준히 잘 지켜나가야겠다는 굳건함이 생기데요.
무엇보다 그런 자기반성을 꺼낼 수 있는 아리샘한테
더 많이 배웠지요.
자신이 잘 못하고 있더란 말, 내 생활의 전부를 까발릴 수 있는 용기가
그를 보다 훌륭한 교사로 만들리라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자기 잘못, 자기 절망을 뒤에 두고
잘한 것 잘난 것만 말하기가 얼마나 쉽던가요.
계절학교 가운데도 오고 간 이들이 많았습니다.
단순히 이곳을 보고 싶어 온 이들에서부터
교사 몫을 나누어 돕겠다 온 이들에 이르기까지.
뭘 봐야겠다 하면, 그리고 평가하려 들면 마음에 부담이 생기고
그것이 관계에서도 잇몸에 낀 고춧가루처럼 작은 불편이 되고,
그래서 스스로의 즐김에 즐거움에 방해가 되는 것도 보았지요.
어떤 이는 가벼이 와서 많이 보고
어떤 이는 너무 무겁게 와서 못보고 가기도 하더이다.
어데서고 자신있는 건 좋지만
(특히 이곳에 아는 이가 있다든지 하면)
남의 집에서는 좀 어려워할 줄도 아는 게
예의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요.
억눌려지지 않은 조심스러움은
외려 자신감 있는 이가 가지는 좋은 품성으로 읽히데요.
어쨌든,
아이들을 놓고 아이들이랑 뭔가 나아가보고자 기꺼이 이 깊은 산골로 온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그들도 우리도 자기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어른이기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가운데 <체리향기>가 있지요.
자신의 자살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한 사내의 여정기입니다.
아주 느린 호흡과 말없음으로,
또 워낙에 좋아하는 감독이어서도 마음 푹했겠지만
거기 흐르는 잊힐 수 없는 긴 대사가 마음을 묶었더라지요.
한 중노인이 그의 아들 병원비 때문에 그 사내를 돕기로 합니다.
그렇더라도 자살을 꿈꾸는 사내를 살도록 설득하기를 포기하지도 않지요.
건조한 길만을 오가던 그 사내의 차를
다른 길로 비잉 돌아서 운전하게 하며
중노인은 제 젊었던 어느 한 때를 들려줍니다.
역시 자살을 꿈꾸었다지요.
어느 아침 밧줄을 들고 한 나무로 걸어갔답니다.
아무리 던져도 밧줄이 걸리지 않아 나무를 타고 올랐겠지요.
줄을 매려는데 어데선가 단내가 확 덮치더라고.
체리였다지요.
하나를 따먹고 둘을 먹고 셋을 먹었답니다.
어찌나 과즙이 좋았던지 향기가 그리 진할 밖에요.
그때 아이들이 그 나무 아래를 지나 학교를 향하고 있었더랍니다.
올려다보며 나무를 흔들어달라 했겠지요.
아이들이 맛나게도 먹었겠지요.
그도 나무를 내려와 체리를 주워 집을 향했답니다.
아직도 멋모르고 자고 있던 아내를 깨워 주었다지요.
그래요, 무엇이 우리를 살고 싶게 하는 걸까요…
아이들이 우리를 살고 싶게 합니다.
때로 말도 안되는 일로 떼를 쓰며 우는 아이일지라도
그 아이들 때문에 우리가 살고
그 아이들 때문에 우리가 죽습니다,
여기는 자유학교 물꼬.

보름, 짧지 않은 날들
함께 고생한 모두에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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