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19.물날. 맑음

조회 수 533 추천 수 0 2020.03.19 00:00:18



부담스러운 일이란

그 부담 때문에 일은 안 되고 자꾸만 사람이 아래로 꺼지기만 하는.

눈을 뜨고, 수행하고, 제습이와 가습이를 데리고 아침뜨락을 걷고,

거기까지는 무사하지만 책상 앞으로 가면 새로 쓸 원고가 까마득하다.

빚 가운데 글빚이 제일 무섭다두만.

25일까지 보내기로 한 새 원고 초고는 아직 길을 헤매는 중.

 

그해 겨울은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라는 문장을 생각하고 있을 때 문자가 들어왔다.

한 도시의 복합문화공간(서점을 비롯한)에서 온 연락.

지난해 낸 책 <내 삶은 내가 살게...>(옥영경/한울림,2019)를 읽기 시작했노라고,

부모교육 강좌를 부탁하려 한다는 강연 담당자였다.

네 장으로 나눠진 장을 따라 4회 강연을 하든,

한두 차례 특강을 하든 차차 논의키로.

 

인근 군의 한 제도학교에서 교장샘이 급히 찾으셨다.

분교의 특수학급을 6개월간 맡아줄 수 있느냐는.

전교생이라야 열도 안 되고, 특수학급은 몇도 안 되는.

아주 못할 것도 아니지만 운전거리가 한 시간 반은 되고(그래서 교장 사택도 내준다지만),

이번 봄학기는 관내 중학교에서 예술명상 수업을 이어가기로도 한 바.

교사들이 섬이라 안 가고 시골이라 안 가고 분교는 더욱 안 간다는데,

그런 곳일수록 기간제 교사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

임용은 적체인데, 

한편 그만두거나 있더라고 아픈 교사가 또 많다는.

주중에는 그 학교에서 주말에는 물꼬에서? 

움직임을 아무리 그려보아도 답이 없다.

"교장선생님, 안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품앗이샘 하나가 긴급히 보낸 글월 하나 닿다.

이번 '어른의 학교'에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먹을거리가 이것이며

혹 또 필요한 게 있는가 물어왔다.

장을 겹치게 보지 않도록 하는 배려이고, 전체 흐름을 거스르지 않도록 하는 살핌이며,

이곳 살림을 헤아려주는 따스함이고, 자신이 할 것을 찾는 애씀이었다.

지난 겨울계자, 그러니까 165 계자 갈무리글을 누리집에 공개해도 되느냐 샘들에게 물었던 첫째 까닭은

(샘들 평가글들은 계자가 끝난 뒤 2주 이내 메일로, 혹은 물꼬 누리집에서 비밀글로 올린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였다.

맨 먼저 공개에 대한 동의를 그에게 구했던.

좋은 글이었기 때문이다.

감동이 있었고, 잘 읽혔기 때문이다.

쉬웠고, 그러나 꼭꼭 연필로 정성스럽게 한 자 한 자 쓴 듯한 가볍지 않은 글이었다.

정말 앞뒤 모르던, 그저 착하기만 했던 스무 살 청년은 그렇게 썩 괜찮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20, 그리고 30대를 통과하는 세월을 보았다.

지난 겨울만 해도 휘령샘도 있었고 태희샘도 있었고 또 다른 샘들도 짱짱하게 동행했지만

그 누구보다 그가 있어 밥바라지까지 하면서도 힘이 들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밤새 아궁이 앞에서 장작을 밀어넣었고

(겨울계자의 아궁이는 혹 밤새 아이들이 떨기라도 할까 퍽 믿을 사람에게 맡겨야만 한다),

더 자도 될 시간에 일찌거니 일어나 나와서 빨래를 챙기고 있었으며,

묵묵히 밥바라지 2호기로 움직였고(이 계자에 그가 쉬고 있는 걸 본 기억이 없는 듯!)

밤이면 물을 끓여 꼼꼼하게 아이들 안고 잘 물주머니를 하나하나 챙겼다.

그렇게 빡빡하게 움직이고도 더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그였다.

호들갑이란 없으며 나섬도 없으며 우쭐해하지도 않고 잘난 체도 않고,

오직 움직이고 또 움직이는 그였다.

어렵게 자영업을 하며 물꼬에 적지 않은 후원금을 보내는 그를 보며

자신의 삶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찾는 한 사람이 준 감응이 컸다.

나는 때로 미안하고(물꼬가 늘 궁해서), 때로 부끄럽고(나는 더 애써지 못해서), 한없이 고맙고 든든하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살린다면 우리 생에 그만큼 위대한 일이 어딨으랴.

스승이 누구인가, 나를 돌아보게 하고 넓혀주고 나아가게 한다면, 그를 스승이라 어찌 말 못할까.

그의 연대로 나는 오늘 또 물꼬 삶을 살아가나니.

희중샘... 


목이 조금 부은 듯하다.

가까이 사는 물꼬 바깥식구 하나가 한방약을 전해주고 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싱숭한 시절이니 단순감기라도 빨리 잡는 게 좋지않겠냐는,

주말 어른의 학교까지 앞두고 있으니.

얼마 전 오른 쪽 날개죽지에 결렸던 담이 다시 또 뻐근해지기도 하고.

그래도 저버리지 못할 약속 같은 삶이지.

오늘은 어른의학교를 위한 청소를 일부 하였더랬다,

학교는 책방과 복도를, 달골은 모둠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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