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났으나 곧 사그라들었다.

늦은 아침을 지나며 비 뿌렸다.

물꼬는 겨울90일수행기간.

날마다 하는 해건지기보다 좀 더 집중적으로 수행한다,

가능한 두문불출 지낸다,

가능하면 방문자를 받지 않는다,

산골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걸 최고 수행으로 여긴다,

그런 정도.

만추에 시대와 불화하느니,

시를 읽고 새벽 일출 같은 뮤즈를 영접하는 건 어떠냐며 지인이 보내온

슈만 헌정곡을 들으며 아침 일을 하였더라.

 

흙집 화장실에 환풍기를 달다.

뭐라도 하나 작업 하려면 이리 날이 길다.

정화조를 놓는다고 꼬마 굴착기가 들어온 게 지난달 11일이었더랬는데.

벽에 구멍을 뚫고 밖으로 빼지는 못했지만

천장 공간이 넓고 그 천장이 허술한 지붕 틈새를 지니고 있어

일단 위로만 돌려내기로.

따로 선을 빼지 않고 전등 스위치에 연결하여 하나로.

 

표현해야지, 안 하면 모른다.

제 때 말해야지, 내게 담겨 있었던 말이어도 지나면 없던 것과 같으니까.

제도학교 현장에 있는 물꼬 식구 둘과 소식 주고받다.

남도 끝단에서 고3 담임을 처음 맡은 이와

학교현장에 있으면서 임용을 준비하는 이.

그 지역 중등 임용 일정이 이번 주말에 1차 시험이다.

물꼬 겨울 계자 때가 2차 시험.

빨리 합격해서 앞으로 겨울계자도 다녀갈 수 있게 되면 좋으란다지.

나는 내 몫으로 기도하겠다, 온 삶으로 그의 삶을 지지하겠네.

3 담임네는, 코로나에 대입에 정신없던 올해였노라며

한 명 한 명 수시합격발표가 나고 있어서 한숨 놓는다지.

애쓰셨네, 애쓰셨네.

겨울물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겨울 지나기 전에 꼭 찾아뵙겠노라 하니

나는 나대로 이 공간에서 열심히 살고 있겠네.

서울에서 초등임용을 준비하는 이는 지난 71차를 잘 보았으려나...

묻는 연락이 부담으로 갈까 지켜만 보는.

 

오랜 인연이다.

오빠가 초등생으로 계자를 다녀간 한참 뒤

동생인 어린 아기는 자라 초등 2년부터 물꼬의 거의 모든 계자를 놓치지 않았고,

새끼일꾼으로서 품앗이 못잖은 손발을 보태고 대학을 갔다. 졸업반이라.

그 기간 동안 엄마도 어느 가을 빈들모임으로 물꼬를 다녀가기도.

몇 해만에 소식을 주셨던 몇 달 전이었고,

오늘 택배가 왔다.

허술한 물꼬 재봉틀 대신 힘 좋게 쓸 수 있는.

몇 마의 천과 액자 몇도 같이 들어있었다.

내게 노는 것이어도 선뜻 내주기 쉽지 않고,

좋은 마음으로 준다지만 누군가에게 뭘 주려면

이러저러 마음 쓰고 손을 움직여야 하는 줄 안다.

고맙다.

 

가습이와 제습이의 피 터지는 싸움으로 우울하다.

같이 산책 나섰다가 여러 날을 싸우더니

제습이의 제압으로 상황은 종료됐는가 했는데,

그 뒤 가습이는 제습이랑 절대 산책을 안 가겠다고 했다.

오늘은 조금 나아진 분위기.

그래도 같이는 안 하겠다 싫어하는 가습이를 기어이 함께 가자 끌었네.

밥 때가 가까워 둘을 한 번에 산책을 다 시키겠다는 주인의 욕심.

고래방 뒤란 저들 응가 하는 자리로 가자마자

! 바로 둘이 엉겨 붙는데,

제습이가 가습이에게 달겨든,

여직 본 그들의 어떤 싸움보다 험했다.

리드줄을 놓고 아예 부엌으로 들어가 두어 가지 챙길 일을 하고 오니 습이들이 사라졌다.

놀래서 불렀지.

멀리 제 집에서 걸어오는 제습이.

가습이는 제 집 앞에서 꼼짝 않고.

각각 묶어주고, 흙이며 침이며 범벅된 리드줄을 가져와 빨았다.

안 되겠다. 이제 다시는 같이 산책 시키지 말아야겠다.

저러도 한 놈 잘못되고 말지...

안 가겠다는 걸 억지로 가자 하고 그런 사달을 보니 마음 툭 가라앉는.

 

집안에 어려운 일을 겪으며 절에 기도하러 다니겠다는 이의 소식을 듣는다.

몇 마디를 보낸다.

특정종교는 아니지만 물꼬에서도 모여 기도들을 해요.

간절하게 에너지를 모으는.

근데 기도란 것도 문제를 직시하고 귀인을 나 혹은 내부에서 찾고

비로소 내가 엎드릴 때 힘을 받을.

우리는 자주 저는 꼼짝 안하고 타인의 변화만을 요구하기도.’

내 힘으로 안 될 땐 신에 의탁도 하지.

그런데, 신 앞에 엎드리기는 사실 얼마나 쉬운가.

문제는 둔 채, 자신을 깨지는 않은 채,

그래서 진정으로 엎드리지는 않은 채 기도만 한다면

문제가 어찌 해결될 수 있을까.

, 물론 제 마음만 잘 다스려도 문제가 문제가 아니기도.

제 마음이 갈무리 되고 나면 이제 문제의 당사자와 풀어야지.

자식과의 관계가 문제라면 그 자식과 풀어야.

그 자식의 마음을 헤아려야.

그나저나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라.

내 삶이 남의 불행을 먹고 이어가는 삶은 아닌가 싶은.

물꼬 일이 그렇다. 좋을 때도 고맙다고 찾지만 어렵고 힘들 때 사람들이 찾아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그대의 불행을 반기는 게 아니라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이 공간에서 적확한 말.

물꼬를 찾지 않음이 잘 지내기 때문이라 믿노니.

다들 부디 다복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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