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9.쇠날. 맑음

조회 수 483 추천 수 0 2021.12.23 23:59:55


봄볕처럼 햇살 퍼지는 날, 봄처럼 그가 왔다....

 

아침수행이 끝나자마자 아침뜨락으로 갔다.

다른 날보다 서둘렀다.

밥못과 달못의 물길부터 살피고,

아고라의 낙엽을 긁었다.

아직 덜 떨어진 마른 잎이 다 내려온 뒤 한 번에 쓸고는 하는데,

그렇잖아도 회색빛 계절에, 찾아온 이의 눈에 거슬릴까도 하여

갈퀴질을 했다.

(, 갈퀴라는 명사를 내 입에서 찾는데

여러 낱말들을 헤집고 난 뒤에야 비로소 제 것을 찾는다.

심지어 사물을 앞에 놓고 그 이름을 생각하는 데도 그런 일이 잦다.

이렇게 우리는 나이를 먹어간다...)

햇발동에 바람을 들이고 창고동도 열어보고,

청소기도 돌렸다.

 

그가 왔다. 30년 만이다.

지난 1교무실 자동응답기에 긴긴 음성이 남겨져 있었고,

한 날 무려 2시간자정까지 30년 세월을 압축한 통화를 했다.

사람 쉬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더랬지.

우리는 그 시절의 패기를 잊지 않고잃지 않고 있었더라.

뜨겁게 거리에서 살다 스무 해를 봉쇄수도원에 가 있던 그는

다시 나와 노무현의 역사를 기록했고지금 한 국립대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학교 앞에 쉐어하우스를 지어 젊은이들과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도 살고 있었다.

20대 내가 했던 말과 표정과 뜻과 꿈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그였다.

나 역시 그의 여러 순간을 기억해냈다.

삶이 구체적이다!”

단순하고 낭만적인 시절을 지나 지금에 이른 그가 통화에서 말한 문장이었다.

그렇다. 우리들이 살아온 삶은 구체적이었다. 모든 삶이 그렇듯이.

그 사이 몇 차례의 통화가 있었고, 또한 온다던 기약이 몇 차례 어그러졌더랬다.

그리고 오늘 그가 왔다.

이즈음엔(겨울90일수행기) 더러 시간과 시간 사이 몸을 느리게 쓰거나 널어두기도 한다 했더니

최상의 전략 아니겠냐 그가 말했다.

나는 그게 게으른 자의 흠이라고 생각하고는 했는데

역시 언제나 모든 것은 해석이라.

 

얼마나 바리바리 싸왔던지.

와인도 치즈도 아, 내가 좋아하는 딱 그것들이라니.

그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는데, 좀 대중적이기는 한 종류들이었으니.

큰 생수를 한 묶음 차에서 내리기도 해서 의아했다.

아하, 원형 패트병을 있으면 몇 구해오라 했고없으면 그만이어도 된다 했는데,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온 그였더라.

요새는 동성을 만나는 즐거움이 더 큰데,

그 역시 그래서 더 반갑기도 했고나.

 

국수를 먹고, 학교 한 바퀴, 아침뜨락을 걸었다. 날이 좋았다.

햇발동과 창고동을 들여다볼 짬은 없었다.

멧골 해가 기울 무렵 대구에서 온 그는 저녁 약속이 있다는 대전으로 떠났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고, 지금의 그가 그때의 그가 아닌데,

우리는 혹 30년 전의 그 모습으로 만나지는 않았을까,

우리가 떠나온 시간을 깨닫지 못한 채.

연대를 기억하는 세대이니, 뜨겁게 그리 어깨동무하는 일도 있잖을지.

반가웠다.

 

갑자기 사람을 또 맞게 되었다. 당장 낼모레.

해 지나기 전에 한 번 가보고 싶었다고,

실은 더 일찍 약속을 잡고 오늘 뵈었으면 했어서 마음이 조급했다고 아이의 엄마가 말했다

마음이 바쁘신 듯하여

나 역시 막 친구를 보내고 일단 다른 일을 밀고 잠깐 책상 앞에서 몇 자 쓴다 했다.

날씨부터 확인하니 다음 주면 영하로 떨어진다는데,

이곳 역시 날을 미루지 않고 당장 다녀가시는 게 좋겠다 답했다.

이틀의 날을 어디로 쓰느냐 다시 두어 줄의 글이 오가고,

아까 확인한, 다음 주 이곳 날씨가 해날(일욜)부터 이틀 비, 다음 이틀은 눈이 잡혀있었습니다.

일욜 월욜 오신다면 빗속에 서로 불편하겠구나, 아무래도 이제 2월 말에나 오십사 해야겠네, 했는데,

, 글쎄 다시 확인한 '영동군 상촌면' 날씨에서 일욜 월욜 비가 사라졌습니다. 아주 맑음은 아니나.

오시라는 말이구나 싶더군요:)

신기해라. 오시란 말이네.

그런데 밤에 다시 일기예보 확인하니 다시 모레와 글피에 비가 잡혔는 걸...

‘"서로 안 돼 보이잖어!", 추운 날씨에 사람 만나는 거 꺼린다는 제 이유이기도 한데

날씨가 어째도 우리 마음이 푹한 이틀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꼬에 처음 오는 이들로부터 하도 종교집단 아니냐 묻는 말을 자주 들어 이렇게 덧붙였다.

, 이곳은 특정 종교가 있진 않으나 영성(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에 깔린 절대적 힘을 믿는다고 해두지요.’

 

, 해질 무렵 은행나무가 한 그루 들어왔다.

학교 마당 가장자리에 흔하나 아침뜨락에는 없었다.

내일 심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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