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엄마가 고운 아이와 와서 고운 공기를 남기고 갔다...

 

밤새 내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바람도 자주 소란했다.

잠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요란한 대나무풍경소리에 깨

들어온 가정이 선물한, 아이 아버지가 그린 만화책을 펼쳤더랬다.

새벽녘 다시 눈 붙였다. 햇발동 거실이었다.

2층에 든 이들의 문소리와 발소리가 침낭 안으로 들어왔다.

 

집에서 아이가 일어난다는 07:30에 맞춰 아침 움직임을 시작하기로 했다.

아침 9시께를 빼고 종일 비가 잡힌 예보였다, 저녁에야 그친다는.

어째도 하늘한테 맡길 날씨였다.

우산을 준비해두었으나 기온 떨어지고 바람 많으니

이 정도 는개비라면 모자를 쓰고 움직이는 게 더 나을.

그래도 움직이라고 그쳐준 비였다.

방이 따스웠다니 다행.

하루 전부터 집을 데웠지만 비워놓은 곳이라 온기를 걱정했다.

좁아 불편한 것보다 따순 게 나으리라고 바람방에 머무십사 했더랬다.

 

엄마와 아이와 아침뜨락을 걸었다.

어제 오후 잠깐 공간을 설명하기도 했던 덕에

오래 머물지 않아도 되었다.

이 먼 곳까지 또 언제 와서 이런 시간을 보낼까 싶어

춥더라도 뜨락의 기운과 아침빛을 주고 싶었다.

아고라에 들어 말씀의 자리에서 손수건을 깔고 서로 말을 줄 수도 있었다.

 

달못의 수면에 떴던 철 성분들이 비에 쓸려주었다.

어제는 기름기가 있던 표면.

돌의자에 앉지는 못해도 돌아서서 산속에 깃든 마을을 다시 보고

아가미길에서 미궁으로 발을 이었다.

조금 빠른 걸음이긴 해도 같이 그 길을 다 걸었다.

미궁을 지키는 뚱까와 이까에게 인사를 건네고

밥못을 들여다보고 꽃그늘길로 내려왔다.

장군바위 곁에 며칠 전 심은 은행나무는 자리를 잘 틀고 있으려니.

안개비가 가랑비로 변해갔다.

굳이 느티나무동그라미에서 나눔을 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햇발동 거실로 돌아와 지금의 마음들을 나누었다.

 

마을로 걸어 내려가도 좋으련,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아침밥상을 물린 뒤 날씨도 도와준다면 마을길을 좀 걸어도 좋겠거니 하던 참이었다.

차를 같이 타고 내려가기로.

학교 본관 복도에는 난로가 켜져 있었다.

수행방에서 해건지기.

몸을 풀고, 대배 백배를 하고, 명상하고.

 

어른들 움직임에 관심 없는 아이에게

난롯가에 이불을 깔아주고 놀잇감을 놓아주었다.

아이가 움직이면 마음이 쓰이는 엄마라.

엄마의 자리가 그런.

타인들이 내 아이로 불편할까 봐, 아이가 뭔가 망가뜨릴까 봐, 아이가 다칠까 봐,

드물게는 내 아이의 바스락거림이 나에 대한 나쁜 평가로 갈까 봐, ...

괜찮다. 하다가 끊어도 된다. 우리가 무에 그리 중요한 일들을 한다고!

적어도 이곳에서는 아이가 방해자가 아니다.

이곳은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

아이들은 그렇다. 가만있지 않는다. 그게 건강한 거다. 이곳은 그걸 아는 곳이다.

아주 가끔 모두가 멈춰야 할 때라면

그때는 아이들도 거기 고요히 동행한다.

충분히 옴작거렸으므로 그쯤이야 해주겠다는 것일지도. 하하.

 

국밥으로 아침을 먹고,

실타래가 이어졌다. 밖은 먹구름과 해와 비와 우박과 바람이 번갈아 다녀갔다.

아이를 알기 위해 어른들을 묻는다.

특히 감정선은 대물림이 되기 쉬우니까

아이를 이해하자면 그 양육자의 서사를 듣는 게 도움이 된다.

해결하지 못한 어른의 문제는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기도.

불가에서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는, 심심했을 텐데도 우리들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게 기다려주었다.

우리(어른들)는 자주 아이들을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하기도. 세상이 또한 그렇기도.

고맙다, 아희들아!

 

해가 났다. 바람은 거칠었으나.

아이를 데리고 엄마랑 옷을 여미고 마을로 나갔다.

물꼬의 아이들이 처음 들어올 때 가는 큰형님느티나무까지 갔다.

300년을 산 나무 아래서 하찮은 세월의 우리는

별 걱정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굳게 선 나무의 기운이 이 엄마를, 아이를 도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알사탕 새 봉지가 떨어져있었는데,

거기 물꼬 사람들 아니면 잘 가는 일 없으니

우리 샘들 가방에서 떨어진 건 아닐까 하다가

또 모르지, 주인이 찾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두고 왔다.

허리를 숙이기가 귀찮았는지도.

 

갈무리를 하고 갈무리 글을 쓰고.

낮밥을 준비하는 동안 엄마는 바느질을 마저 하고 있었다.

손으로 만들던 원피스를 누군가 맞는 사람에게 주고 싶다 하기

색깔이고 모양이고 딱 마음에 들어 내가 주인이네 하였는데,

정말 완성해서 주고가고 싶다고 했다.

아차! 저리 애써 만든 것을 이리 쉬 얻어서야.

냈던 말을 주워 담고 싶었으나 늦었다.

춤명상 의상으로 딱 좋을.

아이네가 떠나기 전 입어보고도 좋았는데,

밤에 편안하게 입어보니 더욱 쏙 마음에 들었네.

물건은 그것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주는 것이 덕:)

 

고구마범벅을 했는데, 그런 거 잘 안 먹는다는 아이였는데,

어머, 마지막까지 딸딸 긁어 양푼이를 비웠다.

야채에 유자청드레싱을 얹었는데,

엄마도 아이도 잘 먹었다.

주먹밥과 김주먹밥과 하얀 쌀밥과 된장두부국과 볶은 김치와 지고추무침과 ...

어제 꺼낸 지고추무침을 엄마가 또 얼마나 맛나하던지.

(몇 개 남지도 않은 지고추무침이었으나 얼른 통에 담아 가는 걸음에 들려주었네.)

밀가루와 달걀과 우유를 먹지 않는 가정이라고 했더랬다.

국수와 김치부침개와 달걀찜과 요걸트가 좋은 먹을거리인 이곳에서...

더구나 고기가 귀한 이곳이라 이러저러 상차림에 마음이 좀 쓰였는데.

아침마다 수행하고 하는 밥이다.

깊은 멧골에서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위해 누군가 아침마다 기도 하고 밥을 했다,

이 밥 먹고 세상으로 나가 두 걸음도 말고 한 걸음만 더 걸어가 줘,

그런 바람의 밥이다. 오래 전부터 나는 그걸 이 생의 소임으로 삼기로 했다.

아시겠지만, 밥은 치유를 넘어 치료로서의 기능도 있다!

이 모자에게도 밥심이 되면 좋겠네.

 

마음 좋은 엄마가 바람까지 달고 가주었나 보다.

그들의 평화도 나누어주고 떠났다.

사람이 다녀가면 뭐라도 할 정리가 생긴다.

햇발동도 정리하고 나오고,

12월에 이 공간을 쓸 일은 두어 달 전에 개인상담을 잡아두었던 이가 하루 다녀갈 때와 청계 때.

그리고는 2월에야 쓰게 될 게다.

여기저기 잘 여며두다.


그리고 아래 엄마가 남긴 글고대로 옮겼다.

괄호 안에 ‘*’표시가 있는 것은 옮긴이가 주()를 단 것.

아이는 그림을 남겼다: 거기 옥샘도 있어서 기뻤다. 내 마음에도 그가 들어와 있다.

 

옥샘께.

 

비도, 바람도, 우박까지!

다채로운 날씨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를 꾸미는 것과 정돈하는 것(*그 차이),

솔직함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방식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고 속편한 밥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만 신경쓰느라 소홀했던 몸과 대화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재와 둘이 시간보낼 수 있는 기회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재엄마 한우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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