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흐렸고, 곧 비 내렸다.

 

무사히 기차에 올랐다는 연락이 왔고,

이어 대해리행 버스 역시 무사 탑승.

비가 굵었다.

11학년 남학생이 이틀 동안(24시간 머무는) 집중상담 과정을 밟는다.

멧골 깊숙한 곳에 하는, 멀기도 한 첫걸음에

길도 얼마나 낯설까 하여 맞으러 나가보자 하는데

버스가 벌써 마을을 들어섰다.

본동에 내리겠거니 했는데, 어라 쉬지 않고 올라가 버리는 버스.

가마솥방으로 서둘러 들어와 전화를 하니

새마을에서 내렸더라네.

석현리 가기 전 마지막 정류장이라고 했는데...”

아차! 종점인 석현리 가기 전 대해리가 마지막이거니 했지.

그 사이에 새마을 정류장이 있단 말이지.

대해리 본동이라거나 자유학교 물꼬를에 가노라 해야 했는데.

서둘러 윗마을을 향해 걸어 올라 내려오고 있는 아이를 만났다.

“**!”

처음 만났지만 회색 멧골에서 만나 그런지 서로 퍽 반가워하다.

어쩌면 그건 순전히 그의 예의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기소개가 오가는 메일, 그리고 어제오늘 주고받은 문자를 통해

배려 깊은 그였고, 그래서 편안해진 느낌이 있었다.

추우신데...”

나와 주어 고맙다고 했다.

인사성 밝은 아이.

 

비 내리는 흐린 날 김 오르는, 고명이 화려한 잔치국수는 맛도 좋았더라.

난로에 올려놓은 고구마에선 포르르 김이 오르고

단내가 가마솥방을 채웠다.

밥상을 물리고 물꼬 한 바퀴돌고,

가볍게 마음풀기가 있었다.

다음은 아침뜨락에서 일수행.

아직 비가 있었으나 하늘이 맑았고,

만약 비가 더 내린다면 아침뜨락을 걷고만 나와도 충분하리.

 

아고라 위 측백나무 1번부터 5번까지 풀을 매고 돌을 고르고,

펴서 잔디를 조금 심겠다는 일 규모였다.

웬걸, 준한샘이 잔디 50단을 내렸다.

그것도, 아무래도 많다 싶어 70단에서 20단은 도로 내려놓고 오셨더라지.

학교아저씨도 올라오고, 그렇게 넷이 하는 작업이 되었다.

마음을 다 써서 하는 아이였다.

달포를 집 밖을, 심지어 제 방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그였다.

갇혔던 몸을 푸는 시간이 필요했을.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던 몸이 생전 해보지도 않는 노동 앞에

다리가 후덜거리고 발걸음이 꼬이고 악, , 소리가 절로 난.

그래도 잠시 숨 고르고 다시 하고 다시 하는 그였다.

뭔가 (물꼬가)전하는 말이 그에게 닿을 수 있겠구나 싶더라.

아무리 좋은 말인들 그가 받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아고라 위쪽 측백나무 너머, 그러니까 지느러미길로 들어서자면 왼쪽 길,

그곳이 그렇게 골라졌고, 잔디가 심겨졌고.

3시부터 저녁 6시까지.

물꼬의 고마운 날씨라!

그대가 좋은 날씨를 몰고 왔구나!”

비 흠뻑 내려 땅을 축였고,

경사지라 물이 잘 빠져있어 질척이지 않아 작업하기 딱 좋았다.

척척 손발들도 잘 맞고.

내가 파고 아이가 잔디를 넣고, 학교아저씨가 흙을 채우고, 준한샘이 자르고.

그러다 또 누구는 심은 잔디를 밟고, 또 누구는 한쪽으로 나온 돌들을 치워내고,

한 사람이 골을 파고 다른 하나가 자른 잔디를 넣고 흙으로 덮고.

한 시간 정도 하자던 일을 그렇게 세 시간을 해내다.

“(잔디를) 더 가져왔으며 욕먹을 뻔했어요.”

잔디를 심었으면 다음은 물을 흠뻑 줄 일인데,

이리 축축한 데다 비 소식이 계속이라.

공으로 하는 일이 되었네.

 

내려와 저녁밥상을 준비하는데,

도와드릴 일 없어요?”

아이가 말했다.

이어서 하는 그의 말,

같이 일하고 와서...”

, 어른도 이렇게까지 보는 이가 드물다.

당연히 밥은 일을 맡은 이가 하겠거니 한다.

물꼬에 자주 드나드는 친구들에게서라도 이런 마음씀을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주 와서, 그래서 밥은 당연히 밥바라지가 하는 일이겠거니 해서?

그런데 이 아이가 그리 말해서 놀라웠고, 감동이었다. 고마웠다.

고마운 마음에 더욱 몸이 가벼웠다. 왜 아니겠는가.

 

맛있네요.”

흑미밥을 좋아해서도 그렇겠지만 역시 일하고 먹으니까.

“(평소)한 가지만 가지고 밥 먹고 그러는데...”

반찬이 많고, 게다 하나같이 맛있어서도 좋단다.

떡볶이도 너무 맛있다고.

김치전 더해주실 수 있어요?”

하하, 이 친구, 아는 게다, 어떤 말이 밥을 준비한 이를 기쁘게 하는지.

얼른 하나 더 해주었네.

후식으로 고구마라떼를 먹기로 했더랬다.

잘 먹었던 밥 사이를 라떼가 꽉 채웠네.

 

다시 자기가 산 날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그 아이를 둘러싼 배경을 들여다보는.

놀라웠다. 거의 살아남았다라고 표현할 만했다.

하지만 부모 처지에서 보자면 아이가 얼마나 답답했을 것인가.

부모자식 갈등이 너무 깊어 암담한 경우였고,

결국 아이에게 듣고, 어른을 만나 변화를 찾아보려는 과정이 되지 않을지.

하루 갈무리를 하고 달골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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