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봄길 나흘째, 2월 28일

조회 수 1737 추천 수 0 2004.02.29 20:20:00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4337년 2월 28일 흙날 비

멀리서 이기고 돌아온 봄이 내는 소리들로
사부작거리는 산골의 밤입니다.
아이들이 돌아갔습니다.
멀쩡했던 하늘이 아이들 갈 녘 비를 뿌리데요,
기다렸다가 내리데요.

마지막까지 아침 해건지기를 함께 하지 못한 아이가 셋 있었습니다.
안타깝데요.
그래도 굳이 잡아놓고 하자고는 않습니다.
살다보면 또 다른 날 있겠지 하니까요.
안한다 한들 그리 별일도 아닐 테고.
몸으로 산을 만들며 저 손끝에서 지리리릭 오는 전율,
깊이 들이쉬고 내쉬면서 내 몸과 밖이 한 통로로 이어지는 만남,
고요하게 몸을 두면서 오는 기쁨,
느끼고 나면 그 맛에 또 하려 든다는 게 해건지기라는데…
다만 좀 알고 가면 좋으련 하는 마음에서 아쉬운 게지요.
이럴 때, 짧은 일정은 하지 말아야지 싶습니다.
처음 오는 아이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인 아이들인 경우엔
아쉬움 더 큽니다.
그게 지들 팔자고 또한 우리 팔자겠지만.
이래도 저래도 나흘 그거 가고 말 거라는 거,
국방부 시계가 그렇다던가요,
어쩡어쩡 해도 그냥 나흘 지나면 집에 갈 거니까
그래서 그 시간 덜 성실해도 되고
그 왜 흔히 개긴다고 하는 거요,
그런 걸 알고 있는 머리 큰 아이들을 보면 서글픕니다.
더구나 아쉬운 것 하나도 없어본 적 없는 아이들이 이곳을 오면
우리 사는 게 다 무언가 싶어요.
우리가 누리는 풍요가 끽해야 아이들 몸 편히 키우자 하는 짓이었나,
자식새끼 고생 안시키고 싶다는 게 고작 이러자고 한 일이었나,
사람이 사람의 느낌으로 살아야지,
타인에 대해, 다른 존재의 삶에 대해 단 한치도 관심이 없는 그 아이들을 보면
정작 화가 나는 건 그들 부모한테 입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똑바로 두어야지 합니다.
대안학교라느니 하는 것에 보내는 관심도
그 가치관을 나눌 생각은 없고
그저 우리 아이가 쌓는 경험 가운데 하나로 툭 던져주고 싶은 것에 불과하다면
보내지 마시라고 권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사느냐, 어찌 살 것이냐 아니더이까.
글을 쓰면서도 이건 또 얼마나 관념 덩어리들인가 싶어
푹 기운 한 차례 빠집니다.
이럴 때 정말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러 우리 아이들에게
“이놈의 자슥, 다시 오지 마라.”
짓궂은 농담을 던지지요.
이곳에 너무나 간절히 오고파 하는 녀석이 게으름(?)을 피기라도 하면 쓰는
무기쯤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말을 한 아이에게 진담을 깔고 썼네요.
그에게 도대체 이 곳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던 겁니다.
이전에는 나흘 밖에 안되는 시간이더라도
아이들 삶에 어느 순간에는 던져주는 게 있을 거라 믿었지요.
그런데 오늘은 문득 정말 그럴까 의심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십년 계절학교 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지 싶어요.
그래서 이리 우울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런가봐요,
손이 닿지않는 것까지 안아내려는 건방은 안떨고 싶은.
서울 오르는 차에서도 상범샘이 한 아이랑도 그랬다지요,
머리도 굵고 그래서 물꼬의 생각을 더 많이 나눌 수 있겠다 했는데
그래서 한참을 얘기 나누었는데,
아예 들으려 하지 않더라나요.
우리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그래요, 그런 아쉬움이 예전 계절학교라고 없진 않았을 것인데
보름짜리를 살아봤고,
이제 아예 애들이 들어와 살 거니까,
장마철 강물 불 듯 하나 봅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잊었던 안톤 슈낙의 수필을 생각하는 늦은 밤입니다려.
그래도 세상은 돌고
우리는 변함없이 그 세상에 아니다 싶은 것에
돌을 던지고 발로 차고 고함을 지를 테지요.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설혹 쓰러지더라도 다시 벌떡 일어나는 뜨거움으로.
그 무엇보다 아이들이 우리를 살리겠지요.
참 너그러워진 태정이,
이제 아이 때를 벗은 최지(윤),
어쩜 그다지도 씩씩해서 어데 내놔도 견고할 것 같은 박지(윤),
내년에는 입학 절차를 잘 챙겨 꼭 물꼬로 들어오고 싶다는 지선이,
학교에선 반듯하지만 여기선 그러지 않을 수 있어 좋다는 경민이,
몸을 쓰는 것에 더디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입이 야문 연규,
징징거리며 문제의 가운데 있어도 금새 터는 태한이,
마음이 많이 둥그래지고 더욱 그러려 애쓰는 문정이,
물꼬의 계절학교에 준비되어진 지인이,
엄마가 보고픈데도 입도 벙긋 안하며 견디고 누리던 태린이,
소란하지 않으면서 죄다 앞에 서서 이 생활의 몫을 챙기는 유진이,
어찌나 즐기는지 보기만 해도 덩달아 보름달이 될 것 같은 진하,
저리 신나고 긍정적일 수 있으면 앞으로 별 걱정 없을 것 같은 현규
똘똘거리며 이제 언니 그늘을 좀 벗어나는 경은이,
틱틱대며 제 식으로 이곳에서 누리는 방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원영이,
물꼬가 익어지진 않았지만 누리는 게 고마웠던 대우와 헌이,
그리고 맨발의 ‘하다’.
아, 한 아이 한 아이 떠올리니
금새 얼굴이 그만 풀어집니다.
글을 쓰고 있는 앞에 놓인 거울을 들여다 봅니다.
마흔의 나이로 치달아가는 아줌마 하나가
이제 연신 헤벌어져 웃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울더라도 바로 그 아이들 때문에 결국 웃을 수 밖에 없어서.
불편한 곳에서 잘 지내준 우리 애새끼들, 고맙습니다.
우리를 무사하게 해준 그 어떤 힘에 고개 숙입니다.
음, 대우는 발가락이 괜찮을 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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