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식구들만 맞은 봄학기 첫 해날, 4월 25일

조회 수 2076 추천 수 0 2004.05.03 14:37:00


05:30 잠이 깹니다.
해날이라고 좀 더 뒹굴어봅니다.
명상을 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가 이메일을 확인합니다.
아이들은 아직 자고 있습니다. 해날이니 8시까지 이불 속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책을 몇 장 들칩니다. 쌀쌀한 아침 기온에 웅크리고 읽습니다.
밥 먹을 준비를 해놓고 아이들이랑 마주 앉습니다.
주 내내 밥을 해야 하는 부엌샘의 일손을 해날 만큼은 덜어주려 합니다.
공동체란 게 그런 거 아닐지요,
끊임없이 게을러지려는 자신과 싸우고
곁에 있는 이에게 맘을 내고 또 내서 할 바를 다 하려 하는 것.
8시 전에 아이들은 이미 일어나서
창가 가까이 누군가의 이불 아래서 수다가 바쁩니다.
새알 옹심이를 빚다가 부엌이 추워 아이들 방으로 갑니다.
아이들이 몰려오기 마련이지요.
건듯건듯 보이는 푸른색이 무어냐 짐작이 가지가지입니다.
아, 오이 냄새다!
그래요, 오이를 강판에 갈아서 넣었지요.
마침 엊저녁 먹고 남은 미역국에 동동 넣어서 먹을라하지요.
요가와 짧은 명상을 합니다.
해건지기 시간만큼은 제법 자리를 잡았습니다.

밥을 먹고 아이들이 먼저 호숫가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저를 불러들입니다.
한데모임에서 중심생각으로 잡아두었던
‘한 집에서 같이 잘 사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를 놓고 깊이 살펴봅니다.
호숫가에서 돌아와
어른들은 어데가서 못다한 자신의 일들을 챙기고
아이들은 저마다 바쁩니다.
승진이와 류옥하다, 령이는 목공실 앞에서 뭔가를 뚝딱거립니다.
나중에 들으니 나무 사다리를 만들었다지요.
언젠가 완성해서 나무를 타고 올라 열매를 따거나 집을 짓는다는.
혜린이 채은이 도형이는 책방 앞에 깔아놓은 돗자리에서 독서삼매경입니다.
나현, 예린, 채규, 혜연이는 인형놀이를 하고
채경이는 삐죽삐죽 여기 저기 참견하고
정근이는 책방에서 나와 잠시 산책을 합니다.

햇살 아래 책장을 잠시 넘기다
피아노를 뚱땅거리다 점심을 준비합니다.
냉장고에 남은 것들을 해치우려 합니다.
콩나물이 더 두면 맛이 변하기 딱이겠네 싶어
콩나물 비빔밥을 내놓을라 하지요.
어느새 들어선 혜린이와 정근 채은이가 뭐 하나 건너다 봅니다.
간장장을 만드는 걸 보며 달래를 캐오겠다네요.
학교 대문까지 정근이의 배웅을 받으며 두 봄처자가 달래를 캐러 떠납니다.
바구니에 실려온 건 달래만이 아니라 돌나물과 쑥도 함께입니다.
밥을 퍼고 있는데 누군가 고추 먹고 맴맴 하는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고’자를 빼고 불러봅니다, 신이 납니다.
이렇게 날마다 경험하는 정토이고 천국이랍니다.
“선생님, 자전거 가르쳐 드리께요.”
사흘 전부터 령이와 정근이가 제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다지요.
“어른 모임 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저마다의 자리에서 끼리끼리,
(그 끼리끼리는 어느새 구성원이 달라져 있습니다)
평상에선 어른들이 오래 이야기를 나눕니다.
한가로우니 이야기는 자꾸 딴 데로 삐졌다 다시 돌아오고 돌아오고 합니다.
미국에서, 한 두어 달 이 공동체에서 지내고 싶다는 초등 6년 아이,
공동체 식구로 지내고프다는 중 1 아이에 대해 어찌 받을까,
그 밖에 몇 가지 일도 다시 잘 나누어봅니다.
아이들을 밤에 맡을 두 샘이 힘에 좀 부쳐하는 듯합니다.
덜 부담스런 이가 맡으면 좋겠지요,
제가 하마 합니다, 하면 되지요.
아이들 일과 공부에서 서로가 맡을 것도 챙기고
아이들처럼 어른도 공간을 맡아 청소를 살피자 했습니다.
어느새 또 저녁을 차릴 시간입니다.
밥을 앉혀놓고 장구를 칩니다.
아이들은 또 저마다 누리고 다닙니다.
정근이는 열택샘이랑 자전거도 타고
조릿대집(아이들 집)으로 우르르 가서 병원놀이들도 하고
(혜린, 나현, 채은, 하다, 승진, 이렇게 읊다보니 정근 채규 도형이만 빠졌네요),
령 혜린 나현이(나중엔 정근이도)는
우물가 너머 내리막길에서 까미를 훈련시키며 달렸다지요.
혜린, 령, 나현, 혜연은 아이들 집에서 퀵보드로 놀다 나현이가 넘어져 다치자
예린이가 어른들이 하는 걸 본대로 약초를 찧어 붙여주었답니다.

저녁으로 얼큰하게 무국을 끓이고 김치쌈을 내놓습니다.
혹 저어할 것 같아 다른 찬은 꺼내지 않습니다.
후식으로는 참외를, 대개는 껍질 째 먹습니다.
7시 하루재기, 앞으로 하고픈 것들로 꿈에 부풀고,
부모님께 편지도 같이 쓰자 하고,
자전거 주차와 공들을 어디다 주차할지도 정하고,
어른들 모임에서 나온 얘기도 전합니다.
아이들은 씻고 속옷과 양말을 빨고
어른들은 또 저마다의 자리에서 아이들 뒷정리를 합니다.
짧아지는 밤도 이 산골에선 금새 깊어집니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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