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31.쇠날. 뿌연

조회 수 479 추천 수 0 2020.03.04 08:43:09


 

아차산 천제단 아래서 맞았던 아침이었다.

벗과 해건지기.

기독교인 그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대배도 같이 하다.

하면서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냐 싶었다가

회개구나 생각을 했다는 그였다.

기도는... ‘의심 없이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네.

 

벗은, 지혜로운 벗은, 이번에도 먼 길 온 친구 그냥 보내기 아쉽다고

선물 상자 하나를 내밀었는데,

탁상에 놓는 로봇형인 601공작소의 시계와 온도계였다.

가는 걸음에 먹으라고 양갱 상자도 챙겨서 같이.

그의 움직임은 자주 적절하고 슬기롭다.

지난번에 건네준 그의 선물은 모 교수가 만든 백자 항아리에 담긴 초와

프라하에서 가져온 소금이었다.

빛과 소금 아닌가!

그런데 이번 선물은 (그가 꼭 의도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시간과 온도이다!

센스 있는 사람이라.

아주 적절한, 그 왜 타이밍이라고 하는, 순간에 그 쓰임이 빛나게 하는 재능이 큰 그이라.

이런 선물들도 뭔가 이야깃거리(그게 글감일 테다)가 될 것 같은.

우린 앞으로 달마다 한 차례 12일 글쓰기 워크샵을 하고

그걸 갈무리 할 무렵 같이 글을 써보자고 의기투합하다.

80년대 한 사람은 권력자의 딸이었고, 또 한 사람은 거리에서 권력을 향해 짱돌을 던졌다.

그는 공대생이었고 나는 문리대생이었다.

머리로 움직이는 그이라면 몸으로 움직이는 나.

그는 서울에 살고 나는 멧골에 산다.

그는 일반 사람이 만나기도 어려운 재벌가 사람이고, 나는 멧골 무명 아낙이다.

아주 커다란 집에 사는 장녀인 그와 달리 나는 아주 작은 집에 사는 막내다.

찾아보면 서로 건너편에 있는 일이 참 많은.

나는 안으로 안으로 더 응집하고,

그는 밖으로 밖으로 더 확장하는 삶이라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우리는 여자로 한국사회를 동시대에 살고 있고,

같이 시카고에 있었고,

같이 아이를 키웠고,

같이 수행을 하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논다.

 

출판사 미팅.

한 호텔의 로비에서 다섯 시간에 달하는 만남이었다.

장소를 서울역 푸드코트까지 이어간.

발간 일정, 홍보일정들을 따져본.

지난 6월에 낸 교육서는 기본 수요가 있고,

출판사가 거래하는 기본 선이 있어 이런 의논 한 번 없이 책을 내놨다면,

이번 출판은 또 다른 성격이라.

교정지를 다 보고 넘기려던 계획이 밀렸고,

무거운 교정지를 안고 다시 내려왔다.

녹초가 되어 영동역에 닿았네.

출판사 분들이 마스크와 손세정제를 챙겨주다,

사람 많은, 닫힌 공간인 기차 안에서 마스크는 꼭 하십사 하고.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그것들을 가방에 그대로 넣고 돌아왔으나

감염자는 쉬 되지 않을 수 있다 하더라도

혹여 보균자로서 전파자가 된다면 큰일이긴 하겠다.

마스크를 하고 다녀야 할 듯.

 

서울서 돌아온 저녁,

마을에서는 귀를 의심할 엄청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sort
6556 '밥 끊기'를 앞둔 공동체 식구들 옥영경 2004-02-12 2125
6555 입학원서 받는 풍경 - 둘 옥영경 2003-12-20 2125
6554 2007.11.16.쇠날. 맑음 / 백두대간 제 9구간 옥영경 2007-11-21 2118
6553 5월 29일, 거제도에서 온 꾸러미 옥영경 2004-05-31 2118
6552 계자 열쨋날 1월 14일 물날 옥영경 2004-01-16 2115
6551 2005.11.8.불날. 맑음 / 부담스럽다가 무슨 뜻이예요? 옥영경 2005-11-10 2112
6550 2005.10.10.달날. 성치 않게 맑은/ 닷 마지기 는 농사 옥영경 2005-10-12 2112
6549 100 계자 여는 날, 1월 3일 달날 싸락눈 내릴 듯 말 듯 옥영경 2005-01-04 2112
6548 6월 10일 나무날, 에어로빅과 검도 옥영경 2004-06-11 2110
6547 6월 11일, 그리고 성학이 옥영경 2004-06-11 2108
6546 물꼬 미용실 옥영경 2003-12-20 2103
6545 6월 9일 물날, 오리 이사하다 옥영경 2004-06-11 2100
6544 5월 31일, 권유선샘 들어오다 옥영경 2004-06-04 2100
6543 2007. 5.31.나무날. 소쩍새 우는 한여름밤! 옥영경 2007-06-15 2098
6542 6월 11일 쇠날, 숲에서 논에서 강당에서 옥영경 2004-06-11 2093
6541 6월 15일, 당신의 밥상은 믿을만 한가요 옥영경 2004-06-20 2086
6540 처음 식구들만 맞은 봄학기 첫 해날, 4월 25일 옥영경 2004-05-03 2083
6539 5월 6일, 류옥하다 외할머니 다녀가시다 옥영경 2004-05-07 2082
6538 120 계자 이튿날, 2007. 8. 6.달날. 비 내리다 갬 옥영경 2007-08-16 2080
6537 2011. 6. 1.물날. 비 / MBC 살맛나는세상 옥영경 2011-06-14 2074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