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린다는 비대신 햇살이 내렸다.

이렇게 맑은 날이라니.

갓 세수하고 나온 듯한 말간 얼굴의 하늘.

창고동 불을 피우고 수행을 하고,

멧돼지가 또 다녀가진 않았나, 우리들의 아침 걸음을 어찌 해야 할까,

아침뜨樂을 먼저 돌아보고,

그리고 햇발동 마당의 풀을 뽑았다.


사람들이 일어났다.

일곱 살 예훈이가 그랬다, 여기서는 눈꼽이 끼지 않는다고,

공기가 좋아서 그런 것 같다고. 아이들은 동물이다!

창고동에서 아침뜨락 안내도를 보고 눈으로 먼저 익힌 뒤

걷는 수행.

일곱 살부터 물꼬의 계자 구성원이었던 열 살 현준이가

앞서가며 사람들을 안내했다.

아고라의 말씀을 자리에서는

네 살 윤진이와 세희가 우리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었다.

달못을 돌고 돌담의자에 걸터앉았다 아가미 길을 걷고 미궁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지렁이도 이리 커요!”

미궁을 막 걸어 들어가는데, 엄마 하나가 외쳤다.

저가 더 놀란 애기 뱀이 돌 안으로 들어갔다.

날 잡아 몰아내야 하나,

그런데 독사가 아니니 저도 살고 사람도 살면 되잖을까 싶은데...

고민해 보자.

밥못에 가서 돌에 하나씩 걸터앉아 노랑어리연꽃도 보고

눈동자를 지나 꽃그늘 길로 내려섰다.

“잣은 언제 따요?”

무슨 소리인가 했다.

측백나무 씨앗을 두고 하는 말들이었다.

“하하, 잣은, 학교 해우소 앞에 깔려 있는 커다란 솔방울 같은 거 있지요?”

그게 잣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들 했다.

물꼬에 와서 호두가 달린 나무를 처음 봤다고도 했고,

은행을 처음 구워 먹어본다는 이들도 있었다.

와도 와도 새로 하는 것들이 있는 물꼬라.


22개월 승준이까지 달골 두멧길을 걸어 내려왔다.

순전히 엄마가 업거나 안아서 그 길을 걷는 건 아니려나,

차로 이동해야 하나 살폈는데,

제가 걷기도 하며 왔다.

현준이가 맨 먼저 달려왔고

동생들이 지지 않고 꼬리처럼 가마솥방으로 들어왔다.


하나 있는 젬베 가죽에 구멍이 뚫렸다.

어린 아이들이야 무얼 알까,

그 물건을 거기 둔 잘못이겠다.

물건이란 기억을 담았다.

제주도의 아프리카박물관에서 아들이 제 용돈으로 사주었던 것.

가끔 악기로도 쓰지만 장식품으로 더 잘 쓰이고 있었다.

악기로는 아쉽겠지만 여전히 장식품으로는 계속 될.

“나중에 어디 가서 보이거들랑 하나 업어와 주시어요.

이왕이면 좀 더 큰 걸로~”

정말 그런 날이 오면 좋겠네.


도자기 주전자 뚜껑이 깨지고, 춤명상 때 쓰이는 유리잔이 깨지고,

모든 물건은 태어난 순간 헌 것이다.

망가진 순간이 제 명을 다하는 것.

어떤 건 긴 시간을 지나 흙에 묻히거나 하여 수천 년을 가기도 하고

또 어떤 건 세상에 나오자마자 사라지기도 하고.

쓰임을 다한 것이겠거니. 그저 물건일 뿐이겠거니.

하지만 산골살림은 밥을 버는 일은 수월하나

공산품을 사는 것에는 안타까움이 있는 살림.

어디 노는 도자기주전자와 유리잔이 있으면 나눠주시기.


“유리꽃병을 깼는데요...”

“네가 깨지지 않아 다행이야!”

햇발동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그 낡은 물새는 벽과 창 아래턱의 곰팡이를 무시하게 하는

밝은 등불 같은 보라색 꽃가지가 유리꽃병에 꽂혀 있었더랬다.

아주 가끔 구경 가는, 멀리 청원에 있는 인테리어 가게에서 사왔던 것.

여러 해 아주 흡족한 장식품이었다.

일상은 우리의 좋은 배움터이고

벌어지는 이런 사건은 공부하기에 얼마나 좋은 거리인지.

아이들에게 책임을 가르치기 좋은 소재일 수 있을 것.

“용돈 모아 나중에 꼭 가져와 줘.”

지름 140mm, 높이 300mm의 유리관 같은 꽃병,

낡은 살림에서 유리는 오래도록 바래지지 않는 물건이라 퍽 좋았는데...


제 그릇만큼 자식도 키우는 거라는 생각을 또 한다.

내 마음 꼬락서니대로 내 새끼도 컸을 것이다.

나는 작았고, 그리하여 내 아이도 그러했다.

물론 이때의 작음은 당연히 외형을 말하는 게 아니다.

타인에 대한 내 마음씀을 따라 우리 아이들도 그리한다.

내가 사는 꼴이 쩨쩨하면서 내 새끼를 너그러운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니!

우리가 그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거의 불가능한 것을, 아이들에게 요구한다.

우리는 거의 절대적으로 변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러라 한다.

에라이! 자주 하는 말이다만, 너나 잘하세요. 나나 잘 할 일이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고? 내가 잘 살아야지.

내 아이가 따뜻한 사람이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그래야지.

우리가 먼저 제대로 잘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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