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 9.물날. 맑음

조회 수 675 추천 수 0 2019.11.27 10:16:59


낮 4시였다.

하지에는 낮밥을 먹고 그늘로 들었다가 다시 일을 시작하기도 하는 시간,

시월에는 하루가 저물어가는 때이다.

별 것도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싶어도

저녁이 더럭 왔다 싶은 시간.

책 한 줄 글 한 줄 읽지 않아도 해가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책상에 쌓여있는 것 가운데 아래쪽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시 그 위에 들고 있는 걸 놓아도

그냥 하루가 갔다. 

멧골의 시월이다.


저녁답에 굵은 느티나무 한 그루 달골에 왔다.

인근 도시에서 공원을 정리하면서 패 내게 된 나무였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몇 그루는 버려지다시피한.

어제 잠깐 그곳에 가 살릴만한 한 그루를 보았고,

실어 달라 부탁을 해놓았다.

마침 이웃에 굴삭기 들어와 일을 하니

며칠 내로 말을 넣어 심을 수 있으리라 하고.

삽으로 심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니.

실어온 이들에게 저녁밥을 냈다.

여름을 지나는 밥상은 나물이 푸지다.

가지나물 무잎나물 호박나물 아삭이고추무침, 얼갈이 김치와 고구마줄기 김치,

시래기국을 내고 만두도 구워냈다.


밤에는 인문학공부를 안내하고 있었다.

오늘은 소설 하나가 재료였다.

사는 일이 굽이굽이 산이다.

우리는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소설 속 주인공은 출가해서 스님이 된 선배에게 물었다,

형, 번뇌를 어떻게 없애요 하고.

선배는 못 없애, 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야, 내 번뇌도 못 없애.

이어진 문장들은 이랬다.

‘그러니까 인생은 손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냥 포기해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마음의 번뇌와 갈등, 고통, 어떤 조갈증, 허기 같은 건 지병처럼 가져가야 하는 것이었다.

아프면 고쳐가며 쓰는 게 몸이라고 하는데 마음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아픈 마음 고쳐가며 쓸 일이겠다.

소설의 어느 구절 끝은 이리 쓰고 있었다.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그렇다. 그저 잘 지내기, 그것이 최종 매뉴얼이다.

우리 마음이 조금 부스러지기는 하겠지만 결코 파괴되지 않을 게다.

그래도 우리는 출근을 하고 낮밥을 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건승을 비노니!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sort
6536 계자 다섯쨋날 1월 9일 옥영경 2004-01-10 2074
6535 97 계자 둘쨋날, 8월 10일 불날 옥영경 2004-08-12 2068
6534 지금은 마사토가 오는 중 옥영경 2004-01-06 2067
6533 120 계자 여는 날, 2007. 8. 5.해날. 비 추적이다 옥영경 2007-08-16 2066
6532 영동 봄길 첫 날, 2월 25일 옥영경 2004-02-28 2065
6531 5월 15일 부산 출장 옥영경 2004-05-21 2058
6530 계자 여섯쨋날 1월 10일 옥영경 2004-01-11 2058
6529 2009. 5. 9.흙날. 맑음 / 봄학기 산오름 옥영경 2009-05-16 2057
6528 3월 1일 나들이 옥영경 2004-03-04 2053
6527 9월 빈들모임(2019. 9.28~29) 갈무리글 옥영경 2019-10-31 2049
6526 2008. 2.23. 흙날. 바람 / 魚變成龍(어변성룡) 옥영경 2008-03-08 2033
6525 옥천 이원 묘목축제, 3월 12일 옥영경 2004-03-14 2026
6524 3월 18일, 황간분재 김태섭 사장님 옥영경 2004-03-24 2022
6523 운동장이 평평해졌어요 옥영경 2004-01-09 2021
6522 2월 29일 박문남님 다녀가시다 옥영경 2004-03-04 2020
6521 자유학교 물꼬 2004학년도 입학 절차 2차 과정 - 가족 들살이 신상범 2004-02-10 2016
6520 97 계자 첫날, 8월 9일 달날 옥영경 2004-08-11 2015
6519 6월 2일 나무날 여우비 오락가락 옥영경 2005-06-04 2013
6518 125 계자 닫는 날, 2008. 8. 1.쇠날. 맑음 옥영경 2008-08-10 2010
6517 3월 8일 불날 맑음, 굴참나무 숲에서 온다는 아이들 옥영경 2005-03-10 2010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