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4.물날. 흐림

조회 수 353 추천 수 0 2020.11.22 11:46:04


 

비는 오지 않고 날만 자주 궂다.

땅은 어찌나 야문지, 마른 날이 길다.

 

미리 아침을 열고 7시면 아이를 깨운다.

(새벽, 다음 주 특강을 갈 곳에 준비물 목록을 보냈다.

그건 이제 강의흐름이 결정되었다는 말.)

수행을 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아침뜨락을 걷고 일을 시작한다.

오늘은 뿌리들을 심기로.

벌써 꽃이 진 분홍 국화 화분 셋을 대문 곁으로, 그리고 창고동 앞으로 심기.

느티나무 삼거리 옆, 그러니까 석축 앞으로 길게 두 줄 분꽃도.

면소재지 한 식당 앞에서 패어낸 뿌리를

하얀샘이 얻어다 주었던.

도라지밭을 또 패고.

오늘은 학교아저씨도 올라와 같이 호미질을 하였더라.

 

정화조를 묻기 위해 꼬마 굴착기 들어왔을 적

본관 앞 한 줄 포도밭 앞에서 서쪽 울타리 쪽으로 우수통과 배관 하나 묻었다.

물이 퍽 많이 고이는 곳이었다.

오늘 거기 흙을 덮고 마무리를 해준 건 하얀샘이었다.

학교아저씨는 간장집 뒤란의 나무들을 정리하고.

나는 가마솥방 다육이며 화분들을 죄 몰아다 물을 주다.

습이들 산책을 시켜주고.

두 마리를 동시에 데리고 나가도 편안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네.

위탁교육 중인 아이는 설거지를 너무나 자연스레 하고 있고,

오늘도 따온 고구마줄기를 능청스럽게도 벗기고 있는.

 

실타래가 있는 물날의 저녁.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그려보았더라.

아이는 적어도 육체노동은 하지 않고 살 거란다.

누구라도 그러고 싶겠지.

그런데 우리가 하지 않겠다는 그것을 누군가는 하고,

그것들이 우리 삶을 굴러가게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건

밥노동이며 청소노동이며들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다.

대부분 하기 싫어하지만 누군가는 하는 고마운 일!

 

호흡명상과 하루재기, 날적이를 쓰고 손빨래를 하고,

그리고 자신의 시간을 1시간쯤 쓴 아이의 방에 불이 꺼졌을 때

비로소 하루가 닫혔다.

이제 내 일을 좀 할까.

괭이질이 쉽지 않았던가 보다,

소파에서 얼른 일어나 랩탑 앞으로 가지지가 않았네.

소피에 엉덩이를 붙인 채 쌓아놓은 몇 권의 책에서 한 권을 든다.

책을 읽다보면 그 책을 타고 다음 책으로 가곤 하지.

읽던 책에서 언급된 책이거나, 같은 분야나 같은 작가이거나,

연결되거나 읽던 책 때문에 생각난 또 다른 책이거나.

그렇게 단편소설집 하나 손에 잡은.

엽기라기보다 하드고어(hardgore)적인 선혈 낭자한 이야기들은

취향이지도 않고 그래서 손에 잡는 일이란 드문데, 불편하니까,

이게 참, 이야기를 밀고 가는 힘이 있더란 말이지.

읽히게 하는 힘, 소설의 퍽 고전적인 미덕 아닌가.

이름이 높아 들은 적은 있는 작가였으나 그의 책을 읽은 적은 없었던.

참 일관되게도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가 자꾸 이지러지는 이야기들이었다.

산 사람이 사람인 것처럼 죽은 사람도 사람이야.

자기가 살아 있다거나 죽었다고 느끼는 건 어느 한 순간이야.

그냥 평범하게 살아 있거나 죽어 있다가, 어느 날 불현 듯 아, 내가 살았구나,

, , 내가 죽었지, 이런 생각이 든다구.

그 순간을 제외한다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똑같이 살고 있는 거야.’


특강을 가기로 한 곳이 있었다.

규정강사료가 낮아 먼 길 부르기에 죄송하다며

대신 준비물을 사며 넉넉하게 주문해 물꼬랑 나누겠다는 답이 왔더랬다.

차명상이고 춤명상이고 물꼬에서 늘 하는 활동이니

이번 걸음에 쓸 거면 여기서도 잘 쓰일 것들.

사람들은 자기의 영역에서 물꼬에 보탬이 될 것들을 기꺼이들 내준다.

보이차도 장만해주시겠다지.

예산범위를 알려주며 직접 고르라고까지.

고마웠네.

 

아침: 만주와 단팥빵과 라떼

낮밥: 잔치국수

저녁: 잡곡밥과 고등어묵은지조림, 콩나물잡채, 무생채, 고사리나물, 어묵볶음, 달걀말이, 고추장게장, 그리고 물꼬 요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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