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봄길 첫 날, 2월 25일

조회 수 2059 추천 수 0 2004.02.28 07:59:00
< 단내 납니다, 대해리 이 바람 >

4337년 2월 25일 물날 맑음

“하늘과 땅과 모울의 주변은 온통 봄이 한창이었다.
봄은 성스러운 불만과 열망에 가득 찬 기운을 품고
어둡고 누추할 정도로 좁은 모울의 집까지 스며들어왔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케네스 그레이엄)의
첫 장 두 번째 문단을 이리 옮겨놓지 않더라도
동구 밖 서성이던 봄은 이제
깊은 골 야물게 박혔던 겨울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맞느라 바람 더 단내 나는 오늘입니다.
그래요, 우리 아이들이 왔네요.
‘깨금발로 오는 봄’을 제목으로 놓은
“2004년 봄, 영동 봄길” 나흘을 시작합니다.
아이 열 여덟, 어른 여덟입니다.
7살 넷, 1년은 없고, 2년 둘, 3년 넷, 4년 둘, 5년 6년이 각각 셋씩.
울산에서 서울에서 대구에서 곳곳에서도 온
남자 아이 일곱에 여자 아이 열 하나.
6년이 되는 지윤이 일곱 살 동생을 데려왔습니다.
동생에게도 이곳에서 지내는 맛을 주고픈 게
지윤이의 오랜 꿈이었지요.
지윤이가 동생 나이 즈음 처음 왔는데
그 아이 자라 제 나이 그 맘 때의 동생을 데리고 온 겁니다.
햐, 세월들이라니…
지윤이의 사촌 태정이는 사정이 있어 낼 아침 일찍 들어올 겁니다.
손으로도 놀고 엉덩이로도 놀고 노래로도 놀던 ‘봄타령’시간,
처음 온 헌이와 대우에게
문정이와 지선이와 지윤이, 그리고 연규가 물꼬를 소개합니다.
재밌지, 정말 재밌다고,
정말 재밌다니까(무슨 말이 더 필요하냐는 표정으로),
집하고는 비교가 안돼,
학교 같지 않은 학교고 선생님들 잔소리가 없는 곳이야,
별도 많고 바람도 좋고…
헌이랑 대우는 방배동 사는 이웃이랍니다.
계절학교라고는 스키캠프만 가봤더라나요.
저녁 먹은 뒤 모둠방 난롯가에서 잠깐 대우랑 헌이랑 얘기 나눌 때였습니다.
“우리가 무슨 별난 이벤트를 가진 것도 아니고
시끄럽거나 아주 신난 것도 아니고
자극적이지도 않고…”
텔레비전도 없고 컴퓨터까지 없어서,
그래서 별 재미를 못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를 드러냈는데
허허, 헌이가 그러데요.
“그래서 자유롭고 좋잖아요.”
정말 별로 재미랄 것 없는 움직임을 둘러보며 어쩌냐 싶은 맘으로 꺼냈는데,
이 편안한 흐름을 제가(헌이) 먼저 누릴 준비를 하고 있더이다.
자꾸 눈이 가데요.
어떤 아이일까 싶습디다.

점심 한 때 벌써 지들끼리 봄맞이를 가데요.
태한 지윤 지인 연규 원영이는 내를 거슬러 올랐다지요.
“봄이다, 정말 봄이다! 얘들아, 봄 같지 않냐?”
“예.”
봄이지, 그래 봄이다,
봄이구나, 봄이네,
그러며 형길샘을 따라 학교를 낀 작은 내를 올랐더랍니다.
지인이가 산을 잘 타더라네요.
지선이도 저만치 따라 올랐더래요.
앉아서 하는 대동놀이들도 해보고
물꼬에서 부르는 노래들도 익히고
생활판소리 한가락에 풍물까지 한 판하니 저녁이데요.
대우는 쇠도 안보고 고개 푹 숙이고 제 흥에 몰입해서 북을 쳐대고,
북 테를 치는 맛에 시도 때도 없이 테로 손이 가는 지인이,
힘이 좀 달리긴 했으나 멋있게 징을 쥐고 섰는 경민이,
자다가 뒤늦게 나타난 원영이 북을 끌어안다시피 치고,
조오기 뒤에서 유진이들이 쇠를 들었고
앞에선 지윤 하다 헌 진하들이 장구잽이를 했지요.
한 시간도 채 못했지 싶은데 제법 판을 이루고 소리가 납디다.
했던 놈들이 소리를 잡아나가기도 하니.
날이 좋아서 아이들은 질퍽이는 운동장 가라도
서성이고 또 서성입니다.
저녁을 먹고는 저마다 구석구석을 누비네요.
태한이랑 현규랑 형길샘은 테니스공으로 벽을 향해 던지며
또 한참을 놀고 있습니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지만 재미있어요.”
헌이가 한데모임에서 그러데요.
한데모임은 강아지 대하는 문제로 한바탕 소란이 있었습니다.
못살게 굴지 말자 약속을 할 참인데
원영이는 못하겠다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강아지 만지듯 달겨들어 귀찮게 했겠지요.
“안건드리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하나씩 결정들이 내려집니다.
남자 여자 방을 쓰는 문제,
불을 끄는 문제,
고요를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조건들을 다룹니다.
“지인이가 강아지를 무서워해서 학교 들어오지도 못했는데
어쨌으면 좋겠는지 같이 얘기를 해보지요.”
정작 지인이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부터 듣습니다.
이제 놀기까지 할 수 있다 하네요.
어떤 문제도 시간이 끼어들고 나면
아무일도 아닌 게 많지요.
그래서 일어나는 문제를 당장 풀려고 달려들 때도 있지만
반 나절이고 한 나절이고
아님 하루를 묵혔다 다루기도 하는 한데모임입니다.

대동놀이,
오줌 누다가도 튀어나오는 원영이랍니다.
그냥 신이 나지요.
아궁이에 불지피던 우리의 젊은 할아버지,
학교 아저씨까지 오재미를 던지러 오셨데요.
발가락이 접질린 대우만 빼고
모두 뛰어다닙니다.
헌이는 대우 곁에서 의리를 지키고 싶지만 자꾸 눈이 팔립니다.
움직일 것 같잖은 유진이도 팔랑거리구요,
연규는 아주 소리 소리 지르구요,
한 발도 못나가지 싶은 태린이도 폴짝폴짝거립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용감한 세남매 지선네들,
대단한 형제들이란 응원은
지선이가 맞은 마지막 오재미에야 수그러들었지요.

“한 살 한 살 먹으니 자리를 잡아가는 아이들 보며
샘들이 이런 재미로 하는구나,
물꼬에서 자주 하는 말, 아이 성장을 지켜본다는 말을 실감하겠데요.”
샘들 하루재기에서 무지샘이 그럽니다.
유선샘도 거드네요.
“아이들에게 참 자유롭게 대하면서 주목하게 만드는 구나…”
그런 것에서 세월을 느낀답니다,
잘 배워야겠다 한답니다.
샘들 하루재기에선 물꼬의 가치관이라든지가 자연스레 드러나게 되지요.
“저는 이곳에 그래서 좋아요,
자신의 치부라든지 혹여 껄끄러울 수 있는 집안사며 갖가지 것들이
여기선 그냥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일 수 있어서,
이곳에선 세상의 그 어떤 기준에서 가치가 매겨지지 않을 수 있어서,
다만 정작 인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 앞에 비로소 고개숙이는 곳이어서.”
그래서 아이들은 헤어진 어머니 얘기도 하고
부끄러이 여기던 아버지 직업을 자랑스럽게 접근하고
새엄마가 될지도 모를 아버지의 여자친구 얘기도 하고…
정토는 혹은 천국은 이렇게 구현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전혀 계절학교 같지 않은,
학교에 당연히 아이들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냥 우리 삶의 한 켠을 차지한 아이들이
저마다 제 자리를 찾아 앉아 재잘거리는 대해리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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