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가뭄은 산골 수돗물조차 원활하지 못하게 한다.

며칠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만 마을 상수도를 쓰기로 한 게.

재작년에 제한급수 이틀 만에 비가 내렸더랬는데,

작년에도 그랬다던가.

내일 비 소식이 있기는 하니 오래갈 일은 아닌 듯한데

하늘이 하는 일을 누가 알까.

세상이 어찌 변했어도 여전히 하늘을 보고 사는 사람살이라.

부엌에 두고 쓰는 물통에 다시 한가득 물을 받는다.


빨랫줄에 대한 로망이 있다면 우습겠지.

언덕 위 하얀 집 마당 잔디밭에서 도드라진 하얀색의 커다란 개를 안고 사는,

그런 로망 하나쯤 남자들은 가지고 산다던 선배의 말이 생각나서 하는 말이다.

그런 것에 견주면 그렇다는.

산골 내 삶의 로망은 그같이 자잘한 것들이다.

팽팽한 빨랫줄에 빨래가 가지런히 걸리고 집게가 물려있는,

어쩌다 거풍을 하는 이불에 고솜한 볕이 앉는 풍경.

호주 애쉬필드에서 여러 달 머물던 때

그곳의 어떤 기억보다 마당에 있던 빨랫줄이 젤로 기억에 남는다.

중심에 빨랫봉을 두고 거미줄처럼 방사선으로 철사들이 있었다.

2층까지 열은 될 방을 쉐어하던 유학생들이

한 날 한 시에 빨래를 다해도 비좁지 않던 빨랫줄.

달골 사이집 남쪽 마당에 빨랫줄 하나 심고 있다.

구덩이를 파고 양쪽으로 철봉을 세운다.

다시 중앙도 철봉으로 고정한다.

철봉줄을 중심으로 양쪽에 평행하게 줄을 다시 묶을 테고,

아래로도 두어 줄 나지막히 묶으려 한다.

볕 좋은 마당 한켠에 있는 빨랫줄,

산골 삶의 내 로망이란 그로 족하다.


저녁, 노 소설가가 내려오셨다.

예전만큼 글을 쓰고 있지 못하다며 두 딸 하숙치며 사신다지.

호박잎쌈이 드시고 싶다셨다.

후배들이 당신을 모시고 노근리며 돌아보는 동안

호박잎을 구해보지.

아직 이 지역 밭에는 호박잎이 드물다, 가뭄이 오래였으니.

가게를 돌아보기 시작한다.

“저기 있어요!”

하지만 없다.

“어제는 있었는데...”

내일은 들어올 거란다.

어디라도 사정이 그러하다.

“그만 됐어. 그냥 와!”

선배들이 어여 밥상 앞으로 오라 전화가 성화였지만,

처음 영동을 온 당신에게 꼭 그거 대접하고 싶었다.


그때 시장통을 지나는데,

한 가게 앞의 평상에 물건을 부리는 할머니 보였다.

당신 앞에 있는 작은 상자에, 호박잎이다!

조금만 팔아라 한다. 한웅큼 그냥 주신다.

모두 모인 식당으로 들어서며 호박잎을 꽃다발처럼 펼쳐 들고 당신께 바쳤네.

“음식은 사랑이야!”

강원도 시골에서 자라 이런 음식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당신이 그랬다.

얼른 껍질을 벗겨 식당 주인에게 쪄 달라 부탁했네.

당신은 그예 호박잎쌈을 드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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