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13.물날. 맑음

조회 수 267 추천 수 0 2020.08.08 23:52:18


 

여기는 분교.

긴 하루였다.

 

한동이의 방문수업.

호숫가에 묶어둔 배 위에도 잠시 올랐다.

물 위에 꽃잎도 띄워보내다.

아이에게 노래도 불러준다,

엄마가 있었다면 그에게 불러주었음직한 노래들을.

돌을 공처럼 둘이서 차가며 집으로 돌아왔네.

오늘은 스카프 두 개로 던져 받으며 방에서 체육활동도 하다.

아이가 숙제를 잘 챙겨한다. 감동이 일기까지.

구구단도 작년에 일정정도 했다는데,

마치 처음처럼 제자리로 가 있기 일쑤인 아이의 학습상황이라

다시 우리는 구구단을 외기 시작하다.

허리 세우고!”

자신감은 자세에서도 나온다.

처음 만났을 적 푹 꺼져있던 아이의 등은

제법 곧추세워져 있다.

 

낼까지 완료해야만 하는 업무가 있었다.

특수교사들은 학기 시작하고 한 달이 특히 바쁘다.

개별화교육계획을 위해 회의하고 기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계획을 짜고,

이 전자문서시대에도 이 서류들은 관련자들이 직접 서명을 다 해야 하는.

마침 낼모레가 최종문서 기한이다.

오전에는 꼼짝없이 책상 앞에 있어야 하는.

분교가 학교를 다 비우고 공사를 할 일이 있어

오늘부터 청소업체가 들어와 물건을 치우는.

다행히 공사를 하지 않는 교실인 2층의 도서실이 있어

거기 책상을 점거하고 일하다.

어수선하고,

그 공간으로 그 층의 물건들이 다 들어오고 있어,

그야말로 물건들에 포위당해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아침에 짜증 난 일이 있었다, 동료 교사를 향한.

전혀 당사자에 대한 고려가 없이 진행하는 일 때문이었다.

여러 차례 그런 일들이 반복되어 왔다.

물론 그가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그의 일을 한.

다만 내게 결과로 그리 된.

나는 짜증난다고 뱉었다, 혼자였지만.

잊은 지 오래된 낱말이었다.

물꼬에서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물꼬에서 나는 주로 화가 없는 사람이었다.

젊은 교사가 좇아와 손을 잡아주었다.

기분 별로인 것 같다고 살펴주었다. 고마웠다.

환한 그대를 보니 나아졌다고 답했다.

덜 젊은 교사가 다가왔다, 남자들은 그런 생각 못해요 하며.

한결 가벼워졌다.

젊지 않은 교사가 와서 그간 마음에 있는 것들을 쏟게 받아주었다.

고마웠다.

그리고 나이든 동료가 무심한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던지고 지나갔다.

위도 아래로도 곁에도 그렇게 동료들이 있다

물꼬에서는 언제나 어른 노릇해야 하는,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는 짜증이라거나 화가 무언지 모르고 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그 자리에 사람은 맞춤하게 된다.

짜증이 날 수 있는 것도 여유였던 거다.
어쩌면 나는 이곳에 물꼬로부터 장기휴가를 와 있는.

그 짜증은 그간 내 안에 있었던 불편이 밖으로 드러난.

우리 학급 아이의 통합학급 교사인 그에게

애라고 많지도 않은데 말로만 친절하고 더 마음을 쓰지 않느냐는 비난의 마음이 있었던.

내 기대대로 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언제나 마음은 결을 골라도 고무줄처럼 제자리로 가 있고는 하는 것.

다시 마음결을 고른다.

 

자정엔 열무김치를 담았더란다.

키우는 동안 보탠 손 없이 열무가 왔다.

다듬지도 않았는데 열무가 왔다.

사택에 굵은소금이 있을 리가 없다.

가는소금으로 절인다.

마침 지난 달날 분교에서, 이어 본교에서 칼국수를 밀고 남은 밀가루가 있네.

풀을 쑤고.

마침 지지난주 본교에서 월남쌈을 모두가 해먹던 날

본교 특수샘이 챙겨준 고춧가루까지 넉넉하게 있었더라.

호주에서 보낸 한 해가 생각났다.

어느 날 김치가 먹고 싶어 양배추로 담아먹던.

적어도 여긴 한국이잖여.


제도학교의 이 사택은... 학교 옆이긴 하나 얕은 산을 끼고 그 아래 덩그마니 있는.

그래서 쏙 들어오면 여간해서 나가지 않는다.

밤이면 더욱.

그러니 고립감(집이 주는)이 큰.

사람들이 물었다, 무섭지 않냐고. 그렇게 물을 때 그만 무서워진다니까.

물꼬는 달골도 무섭지 않은데,

여긴 아직 익어지지 않은.

무서움이란 상상과 동행한다.

머리 안의 호랑이가 더 무서운.

제도학교 교장샘의 말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내가 거할 땐 사택을 내준다시더니

내가 다른 교사를 보내겠다고 했을 땐 여자 혼자 못 있을 거라고 했던.

아니, 저는 혼자 거기 있어도 되고, 다른 여자 분은 안 된다구요?”

물꼬에 사는 수행자는 괜찮다고 생각하셨던 거다.

물꼬 같은 곳에 혼자 살고 있는 사람이면 괜찮다고 말이다.

교장샘, 저도 무서워요!”

 

얼마 전 입안이 너무 잦게 허는 문제가

몸의 다른 부위의 문제가 아닌가 진단을 했던.

오늘 여러 가지 검사 결과가 나왔다.

거참, 척추가 너무 곧아서 문제라니.

어느 쪽으로나 지나쳐서는 문제다.

 

물꼬에서는 학교아저씨가 하루 달골 올라가 아침뜨락에 물을 주었다는.

사이집 잔디 심은 곳, 아침뜨락에 심은 것들.

멀지 않은 곳인데 그저 떨어져 있음으로 퍽 물꼬가 그리운 밤.

우리 제습이와 가습이는 안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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