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서 여쭙는 안부

조회 수 1983 추천 수 0 2007.07.19 15:39:00

음...

여전하시지요?
여기는 시카고.

며칠 전엔 푸새를 했습니다.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겠지요.
풀을 쑤려니 통밀 밖에 없기 밥을 망에 걸러 풀물을 냈습니다.
손바느질을 해서 만든 면지갑을 쪼물쪼물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을 못하는 대신 다른 천에 말아 한참을 꾹꾹 밟았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복잡했던 일들이 자리를 찾아가더이다,
상처가 아물듯 노여움이 희미해지듯.
나이를 더할수록 시간에 기대 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산골 삶터를 떠나 풀어진 긴장으로
얼마쯤은 앓고 얼마쯤은 게으른 날들이었습니다.
작년에 머물던 두 달은 그만큼 여유로왔던지
어깨앓이를 하면서도 날마다 쓰는 글도 있었고
무가 잡지란 잡지는 죄 끌어다 읽으며 영어감각도 익히고
박물관이다 랜드마크다 전시회다 도서관프로그램이며
파티란 파티는 다 찾아다녔더랬지요.
달포밖에 되지 않아서 뭘 하기에 짧네,
오랜 여행지에서 돌아온 고단한 나그네처럼
물 먹은 소금섬마냥 가라앉기만 하는 이번 걸음이었습니다.
3주를 보내고서야 이제 언제 또 오나 싶어
우리 모자를 기다리던 반가운 친구들과 밥도 먹고 인사도 나누었지요.
“왜 굳이 (한국으로)들어가냐?”
여전히 이렇게 말하는 그들은
중국에서 스리랑카에서 태국에서 일본에서 와 자리를 잡았거나
미국이 모국인 친구들입니다.
왜냐면, 왜냐면 말입니다,
물꼬가 거기 있으니까요.
우리 가족은 머잖아 우리들의 땅으로 갈 갈무리를 하나 하나 하고 있지요.

대해리에서도 몇 차례의 소식이 있었습니다.
종대샘은 달골 콩밭 풍경을 사진으로 전해주기도 하였지요.
'국선도수련'과 '평화의마을'단식기간 가운데 하루가 서로 겹쳐
오전에 나가고 오후에 들어오는 걸로 정리가 되었다 합니다.
곳곳이 물에 잠긴다는 소식에 걱정이 컸더니
미리미리 파 둔 배수로 덕에 물도 술술 잘도 빠진다데요.
계자는 모든 일정이 다 찼고 대기자 자리만 있다 했습니다.
젊은할아버지와 종대샘은 아침 일찍 달골에 올라
게서 아침 점심을 먹으며 포도밭을 돌보고
아래 학교는 상범샘이 지키며 계자 준비를 하고 있다지요.
마늘도 캤다는데 생각보다 많이 나왔고,
달골포도는 봉지옷을 다 입었답니다.
7월 첫 주말 태석이삼촌과 인호삼촌이 와서 같이 했다지요.
작년 이맘 때 처음 다녀간 인호삼촌이니
아직 얼굴도 못본 거네요.
태석샘은 전북 한 특수학교의 교사가 되었다는데,
물꼬가 딱히 도운 일도 없으면서 그저 고맙고 고마웠습니다.

산골마을 달랑 홀로 남은 아이 종훈이는
무지 심심해한다지요.
그래도 돌이, 나무가, 이웃 어르신들이 얼마나 좋은 친구일지요.
지난 초복엔 닭을 잡아 종훈네서 먹었답니다.
아, 박진숙엄마는 가끔 가마솥방을 들여다봐주시는 모양입니다.
참 좋은 이웃입니다.

수요일 밤 23시 15분부터 0시 15분까지 하는 60분 방송인
대구방송 'TV 좋은생각'에서 촬영의뢰가 들어왔다지요.
계자 가운데 한 일정을 하면 어떨까 물어왔답니다.
한사람이 와서 5박6일 내내 같이 찍는다고 했습니다.

달팽이학교에서 전화도 왔다 합니다.
가을학기에 그 쪽에서 하는 좋은 캠프가 있는데
우리 아이들도 함께 하고프다네요.
봄에 진달래꽃 들고 오신다더니 소식도 없다더랍니다.
그러게요, 그 걸음 한 번이 어려웠네요.
물꼬를 위하여 기증한다던 디지털카메라들도 그 편에 실어오겠다 하였는데...

그리고 이곳.
멀리 있다고 물꼬일로부터 떨어져있지는 않지요.
지구 반대편에서도 인터넷이며로 얼마나 교통이 쉬운 시대인가요.
전화기에 늘 부재중임을 알리는 대해리가 정작 멀지요.
이번 여름 계자에도 공연을 한 편씩 올리면 좋겠다 하고
몇 극단과 얘기가 오가고 있습니다.
한 밤의 국악공연 하나, 인형극, 교육극 하나를 준비하려 합니다.
부엌에 손이 더 필요할 것 같아
도움꾼을 어떻게 붙일까 이리 저리 가늠도 해보고 연락도 하고 있지요.
그동안 물꼬를 돕는 어르신들께
못 다한 인사들을 두루 여쭙는 글월도 쓰고,
몇 기관에 학교 일로 보내는 문서들도 챙기고 있습니다.

기락샘과는 무수한 토론으로 자주 날밤입니다.
대학 때 세미나를 하던 것 같은 긴장은
아줌마로 혹은 일상에 묻히는 이로 퍼지지 않게 합니다.
말이 되는 사람과 사는 일은 얼마나 커다란 복인지요.
“내가 그랬다니까...”
하루에도 열댓 차례는 열어보는 물꼬 홈페이지를 곁에서 보며
그가 말했지요.
그랬던 겝니다,
산골생활에서 잘 챙기지 못하고 사는 홈페이지의 스팸글까지
열심히 그가 지워주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들도 그리 해주고 있었을 겝니다.).
류옥하다는 집에서 불과 두 블록이면 갈 수 있는
공립학교의 여름학교를 나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도시락 싸들고 가는 재미로 다니는 것 같다고
엄마 아빠가 수군거리지요.
아빠가 들고다니는 도시락이 부러워
작년엔 집에 있으면서도 도시락통에 밥을 먹던 그였거든요.
나들이(field trip) 중심이니 별 부담이 없긴 하나
이제는 영어를 다 잊었는데
가겠다는 것도 용터니 별일없이 여전히 가고 있답니다.
“‘아이자야’랑은 아무도 안 놀라 그래.”
냄새 나고 끼어들고 뭐 그렇다는데,
아, 이럴 어쩐답니까.
따돌림 당하는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젤 먼저 드는 겁니다.
이런, 이런, 이런...
수많은 학부모들의 마음을 이제야 헤아리는 듯하였지요.

기락샘은 긴긴(가족과 대부분의 시간을 떨어져 산) 5년의 유학생활을
8월 31일이면 마무리합니다.
“남들은 요새 7년 한다는데
우리 아빠는 5년 만에 끝내고 8월말에 짐 싸서 가요.”
류옥하다선수, 남들한테 하는 자랑이지요.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나오는 돈으로
학비와 생활비 용돈까지 다 해결하고 가족들 용돈까지 챙기던 그가
올 여름은 그 꼬깃꼬깃한 돈으로 가족들 며칠 미서부여행도 마련했더랍니다.
홀로 도시락을 싸다니며 그도 최선을 다하고 산 게지요.
모두 최선을 다해 산다는 걸 잊지 않으면
다른 이에 대한 화도 쉬 일지 않게 됩니다.
'누구라도 최선을 다 하고 있다!'
지난 학기를 잘 살아낸 지혜도 이러하였더이다.

시간 금방입니다.
곧 뵐 테지요.
푸새를 한 천은 빳빳하게 모양이 잡혔고 보송보송해졌습니다.
풀 먹인 삼베요에 풀 먹인 삼베이불, 그리고 베개는
여름밤의 잠을 얼마나 달게 하던지요.
고솜한 햇볕냄새와 울어머니내가 나던 그 잠자리처럼
눅진한 날들 또한 그 같으소서.
그-립-습니다...

2007. 7.18.물날
옥영경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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