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첫날.

뭐 이런 말을 하는데 굳이 조지 오웰까지 들먹이냐만

그의 말을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지만 인간일 수 있다’던.

무용성이 유용성을 만들듯 쓸모없는 시간이 삶을 쓸모 있게 만든다.

쉬어가자, 며칠!

학교아저씨는 귀성열차를 타고 서울 길로 떠났네.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오전이었다.


떡이 왔다.

올 한가위 명절은 명절 음식을 하지 않기로 했다.

차례를 지내는 것도 아닌 데다

찾아드는 이들을 위해, 특히 보육원에서 자라나 세상으로 나온 아이들을 위해

꼭 명절 음식을 했더랬다.

올해는 특별히 온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고,

그렇다고 지나며 들릴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닐 것을

오면 오는 대로 따순 밥을 내면 되리 했다.

송편도 챙기지 못했는데,

어찌 그걸 또 헤아린 논두렁 한 분 계셨네.

오늘 떡을 들여 주고 가셨더라.


엊그제는 명절 앞두었다고 사과가 한 상자 들어왔다.

명절이 그렇더라,

그런 때 인사들도 나누고, 마음도 전하고.

명절, 그걸 꼭 지켜야 되냐, 뭐 그런 게 다툼거리인가.

차례를 지내야 하면 지내면 되지.

그래도 명절이어 가족들이 한 자리 모이기도 하고

순기능은 또 얼마나 많은가.

명절이래야 한 해 크게 두 차례, 365일 가운데 그 며칠을 못 내놓을까.

명절에 하는 일에 대한 부담감이 서로를 힘들게 한다?

당연하게 생각하니 안 할 때 비난 받고, 당연하게 생각하니 함부로 대해진다.

당연한 게 어딨나.

당연히 며느리이므로 이래야 하는 그런 거 어딨나.

서로 마음 쓰면 될 일이다.

서로 고마움을 잊지 않을 일이다.

와줘서 고맙다, 차례상을 차려주어 고맙다, 그런.

처음 만나는 관계라고 생각해 보자, 얼마나 조심스러울 것이냐,

작은 하나에도 얼마나 고마울 것이냐.

아내이므로 며느리이므로 당연하게 하는 역할이라니!

정히 어려우면 그만할 것.

서로 척지는 것보다야 그게 낫지 않나.

하기야 다른 이들이 명절을 쇠러 다녀오는 동안

언제나 물꼬에 남아있는 나로서는(인사는 명절 전후로 간다)

그 처지를 다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니어 말할 처지도 아닐세...

내가 그럴 수 있는 배경에는 어쩌면 혼례를 하며 양가로부터 무엇 하나 받지 않은,

일종의 자립 혹은 독립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받은 게 없으니 큰 소리 칠 수 있다?

받은 게 있으면(그게 참, 무슨 뇌물도 아닌 것이...) 모른 척 못하지.

받은 게 없으면 시댁 혹은 친정으로부터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지.

물론 그게 다가 아니겠지만.

받고서 모른 척 하면 안 되지 않느냐 말이다.

혼례를 앞둔 그대, 할 만하면 양가에서 그리 받지 마시라!

여러 댁의 명절 하소연을 들으며 든 생각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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